안동 놋다리밟기 ( 놋다리밟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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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놋다리밟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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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 대보름 경상북도 안동에서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 행렬을 만들고 그 위를 어리고 예쁜 소녀를 공주로 뽑아 걸어가게 하는 성인여자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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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음력 정월 대보름 경상북도 안동에서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 행렬을 만들고 그 위를 어리고 예쁜 소녀를 공주로 뽑아 걸어가게 하는 성인여자놀이.
내용

1984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음력 정월대보름날 밤에 행하여지며, 동교(銅橋)·기와밟기·인다리[人橋]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분포지역은 안동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군위군, 동쪽은 영덕에 이르고 있어서 주로 내륙지방에 전승되고 있다.

놀이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국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오랫동안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놋다리밟기의 유래담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왕후와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길을 떠났다. 개성을 떠나 문경 새재[鳥嶺]를 넘어 예천의 풍산을 거쳐 소야천(所夜川)의 나루에 이르렀다. 이 나루를 건너야 안동에 들어오게 되는데 물이 불어 신발을 벗고 건너야 했다.

때는 겨울이어서 물이 몹시 찼다. 이 때 마을 부녀자들이 나와 개울에 들어가 허리를 굽히고 다리를 놓아 왕후와 공주가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너가게 하였다. 즉, 인다리를 놓아 왕비와 공주를 모신 것이다.

왕 일행은 안동을 지나 경주로 피난할 예정이었으나 홍건적이 문경 새재를 넘어오지 않았고 안동지방의 인심이 후하여 다음해 봄에 개성으로 환궁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로 안동에서는 새해를 맞이하여 상원(上元)날 저녁이면 마을 부녀자들이 모여 놋다리놀이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피난 중 불편하게 지내는 공주를 위안하기 위하여 놋다리놀이를 고안하였다는 설도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안동으로 피난간 일은 역사적 사실로, 1361년(공민왕 10) 11월 19일에 궁궐을 떠나 한달 만에 안동에 도착했는데 이 때는 연말연시의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놋다리놀이의 기원설과 일치한다.

그리고 왕이 공주를 데리고 피난을 왔다는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없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의 공주는 노국공주(魯國公主)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설화에 근거를 둔다면 놀이의 형성연대는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무렵으로 볼 수 있고, ≪동국세시기≫의 기록을 보면 적어도 그 저작연대인 1849년 이전에는 이미 형성되었던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놋다리밟기를 고대사회에서 단순히 만월(滿月)의 축제로 행하여지던 민속놀이로 본다면, 공민왕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전승되어오다가 홍건적의 난 때에 왕과 왕비를 정성껏 모시려는 백성들의 정성으로 이 놀이가 채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놋다리밟기의 내용은 ≪동국세시기≫에 기록된 것과 오늘날 전승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정월대보름이 가까워지면 소녀들에 의해서 ‘아기놋다리’가 시작되고, 대보름날 밤에 백여 명의 부녀자들이 한마당에 모여 본격적인 놋다리놀이가 벌어진다.

평상시에는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였으나 상원날 밤에는 이 놀이를 위하여 많은 부녀자가 모이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놀이 방법은, 모두 허리를 굽히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안고 얼굴을 앞사람의 궁둥이에 대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다. 이러한 모습을 ≪동국세시기≫에서는 ‘물고기를 꿴 형상’과 같다고 하였다.

허리를 굽힌 수많은 사람들의 열이 이루어지면 7, 8세쯤의 어리고 예쁜 소녀를 공주로 뽑아 곱게 입혀 등 위에 올려놓고 열 뒤에서 앞으로 천천히 밟으며 걸어가게 하는데, 마치 다리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이 때 공주가 쓰러지지 않도록 양옆에서 한 사람씩 손을 잡아 부축을 한다. 부축하는 사람의 옆과 뒤에는 놋다리노래를 하는 장년 여인들이 서서히 따라온다. 공주가 등을 밟고 지나가면 그 여인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행렬의 맨 앞에 가서 다시 허리를 굽힌다. 이렇게 되풀이하기 때문에 행렬은 한없이 계속될 수가 있다.

행렬의 맨 앞에나 공주의 주변에는 ‘창립(創笠)’이라 하여 친손자와 외손자를 둔 관록이 있는 할머니들이 따른다. 노래는 창립이 선창으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뒤에 따르는 사람이 받는 소리를 하는데, 매우 느린 가락으로 부른다. 이 놀이는 여인들끼리만 하는 놀이이기 때문에 남성의 접근을 금한다.

그러나 어쩌다가 남성이 접근하거나 희롱을 하게 되면 창립이 나서서 따귀를 때리고 욕을 하는 등 망신을 주어 쫓을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친손자와 외손자를 두었다는 것은 여인으로서 할 일을 모두 해서 권위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권위 있는 여성이기에 남성도 견제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셈이다.

놀이의 진행방법은 같은 안동에서도 성안과 성밖과는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놀이의 행렬이 어쩌다가 다른 마을의 놋다리놀이 행렬과 마주치면 성안에서는 서로 의좋게 비켜서 지나가는 반면에, 성밖의 변두리에서는 서로 싸움을 벌이는 수도 있었는데 이것을 ‘꽃게싸움’이라고 한다. 이 싸움은 특히 의성지방에서 두드러진다.

성안에서의 놋다리밟기는 주로 ‘줄놋다리’이어서 골목을 따라 앞으로 행진하는 형식인 데 비하여, 성밖의 놋다리밟기에서는 행진도 하거니와 때로는 원을 그렸다 풀었다 하는 ‘둥둥데미’도 있고 허리를 굽힐 때에 앞사람의 허리를 감아쥐지 않고 일렬 횡대로 서서 허리를 굽히는 수도 있다.

이럴 때에는 등 위에 걸어가는 사람의 중량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놀이로서는 줄놋다리보다는 변화가 있어 다양해진다. 놋다리놀이를 할 때 부르는 <놋다리노래>는 그 형식이 메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로 되어 있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메기는 소리)(받는 소리)

어느윤에 놋다리로청계산에 놋다릴세

이터전이 누터이로나라전의 옥터일세

이기와는 누기와로나라님의 옥기왈세

(중략)

몇대간을 밟어왔노쉰대간을 밟어왔네

무슨말을 타고왔노백대말을 타고왔네

무슨안장 실고왔노순금안장 실고왔네

놋다리야 놋다리야

4·4조의 율격으로, 가사는 일정하지 않고 선소리를 메기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다양하게 즉흥적으로 불려질 수가 있다. 서두에서 ‘청계산의 놋다리’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 ‘놋다리야 놋다리야’로 끝나게 된다.

놋다리놀이의 행렬이 밤이 늦도록 계속되면 같은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수도 있고 같은 가락에 가사만 달리 <베틀가>나 <시집살이 노래> 등의 부요(婦謠)가 삽입되어 불리기도 한다.

놋다리놀이는 경상북도 의성과 전라북도 정읍·임실 등지에서 전승되고 있는 기와밟기와 그 놀이와 노래가 유사하다. 그러나 의성의 기와밟기는 격렬한 싸움으로 승부를 내는 데 비하여 놋다리밟기는 싸우는 일이 거의 없다는 데 차이가 있다.

이 놀이는 오랫동안 전승되어오다가 1910년경 무렵부터 쇠퇴하여 거의 중단된 상태에 있었으나 근래에 복원되어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민속놀이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지금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놀이는 신앙성이나 승부가 결부되지 않은 여성들만의 순수한 집단민속놀이라는 점에서 특징을 지닌다. → 기와밟기

참고문헌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한국민속학논고』(임동권, 집문당, 1971)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경북편-』(문화재관리국, 1974)
『한국민속대관 4-세시풍속·전승놀이-』(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2)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임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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