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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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 대보름날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겨루던 성인남자놀이.
이칭
이칭
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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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음력 정월 대보름날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겨루던 성인남자놀이.
내용

음력 정월 대보름날 각 지방에서 행하던 남성의 돌던지기놀이로 ‘편쌈’이라고 하며 한자어로는 ‘석전(石戰)’ 또는 ‘편전(便戰)’이라고 쓴다.

석전 놀이는 들판에서 한 마을 혹은 한 지방이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수백보의 거리를 두고서 돌팔매질을 하는 것으로 패하여 달아나는 편이 진다. 처음에는 먼 곳에서 던지다가 놀이가 점차 고조되면 서로 가까이서 돌을 던진다.

석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수서 隋書≫ 고구려전에 보이는바, “고구려는 매년 정초에 패수(浿水:지금의 대동강) 위에 모여 좌우 두 편으로 나누고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운다. 이 때 국왕은 요여(腰轝)를 타고 와서 구경한다.”고 하여 고구려에서는 석전이 하나의 국가적 연중행사로서 국왕의 참석하에 행하여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사≫ 신우 13년 5월조에는 “왕이 석전놀이를 연암(鳶岩)에서 보고 그 이튿날에도 석전 구경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때에는 고구려와는 달리 5월 단오에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에는 석전을 주로 담당한 석투반(石投班)과 석투군(石投軍)을 별도로 설치하여 석전을 장려하였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때와 세종 때에 석전이 성행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1419년(세종 1) 4월에는 왕이 태조 시대에 있던 날쌘 석전대(石戰隊)가 폐지된 것을 걱정하고 이를 부활시킬 목적으로 석전자발대를 모집하였다.

이 모집에 응하는 자는 천민일 경우 복호(復戶:부역·조세를 면해주던 일)시키고, 양민일 경우 서용(敍用:일정한 품급으로 임용하던 일)을 시키라고 하였다. 또한 세종 3년 5월조에는 상왕(上王)인 태종이 병환중임에도 불구하고 석전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여 상왕으로 하여금 친히 구경을 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부상자에게는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하여주고, 선수에게는 상을 내렸다고 한다. 1426년(세종 8)과 1427년에는 명나라 사신이 친히 구경하기를 청하여 이틀 동안 종루(鐘樓)에 올라서 구경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436년 6월에는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에게 명하여 석전군으로 야인(野人)을 방어하라고 하였다.

한편, 1508년(중종 3) 삼포왜변 때에는 안동과 김해의 석전선수 수백 명을 모집하여 왜인을 쳐서 격파하고 실전상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안동대도호부 풍속 석전조·김해도호부 풍속조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해마다 4월 8일에 아이들이 성 남쪽에 모여 석전 연습을 하고, 단옷날에는 장정들이 모여 좌우로 편을 나누어 기를 들고 북을 치며 돌을 빗발같이 던져서 승부를 결정하는데, 상하거나 죽어도 후회하지 않고 수령이 금하여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18세기말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 京都雜志≫ 석전조에는 “삼문(숭례문·돈의문·흥인문) 밖과 아현(阿峴)사람이 만리재[萬里峴]에서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웠는데 삼문 밖 사람이 이기면 경기도에 풍년이 들고, 아현사람이 이기면 다른 도에서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는 기록과이 있다.

“이 석전이 한창 심할 때는 함성이 천지를 울리는 것 같고, 이마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당국에서는 왕왕 금하였다.”고 하여 당시 서울의 석전 광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한편 ≪동국세시기≫에도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이와 같은 석전놀이가 행하여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여러 기록을 고찰해보면 석전은 우리 나라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와 조선조 초기에는 더욱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석전은 전쟁에 대비하여 연무(鍊武)의 큰 뜻을 가지는 전투적 놀이, 또는 실전 연습의 놀이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큰 전투기술로서 석투반·석투군 등의 군대조직이 편성되었을 정도였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삼포왜변 때 안동·김해 등지의 석전선수들을 모집하여 왜인의 난동을 막기도 하였다. 석전의 도구로는 망패·망팔매·줄팔매 등으로 불리는 끈이 사용된다.

한쪽 고리를 집게손가락에 끼고, 중간부분은 돌멩이가 잘 얹히게 여러 가닥으로 펴고, 또 한쪽 끝의 너스레를 단 부분을 쥔다. 이것을 빙빙 돌리다가 한쪽 끝을 놓으면 돌이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간다. 싸움에 있어서는 배수진(背水陣)이니 장사진(長蛇陣)이니, 장사진에 좌우익을 단다느니 해서 여러 가지 진법(陣法)이 사용된다.

싸움은 며칠씩 밀고 밀리고 하다가 마지막 결전에서 승패가 판가름난다. 때로는 상대방 마을을 점령하여 휩쓸고 부수기도 하였다. 석전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하나의 연중행사로 각 지방에서 행하여졌으나, 일제강점기에 금지되어 오늘날에는 전승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석전고(石戰考)」(손진태,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48)
「석전(石戰)놀이」(최상수, 『한국의 세시풍속』, 고려서적, 1960;『한국민속놀이의 연구』, 성문각, 1985)
「석전놀이와 사자놀음」(최상수, 『한국의 민속과 그 유래』, 내외문제연구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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