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중요무형문화재(현, 중요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동채싸움’이라고도 한다. 정월대보름날 마을 청장년들이 패를 갈라 동채(차전놀이할 때 쓰는 물건)를 서로 부딪쳐 승부를 겨루는 집단놀이이다. 안동은 영남의 큰 고을로 행정 · 문화 · 교통의 요지이며 명문대가가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서민들의 상무성(尙武性)을 나타낸 차전놀이가 언제부터 행하여져왔는지 그 유래나 기원에 관하여서는 문헌상으로 고증할 길이 없으나, 현지의 전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은 지렁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왕이 되어 안동 땅에 와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결전을 하게 되었다.
이 때에 권(權) · 김(金) · 장(張)씨의 세 장군이 있어 왕건 편을 들었고, 안동사람들은 견훤이 지렁이임에 착안하여 낙동강에 소금을 풀어 짜게 만든 다음 얼개로 밀어 견훤을 낙동강에 빠지게 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왕건은 자기를 도와준 세 장군을 삼태사(三太師)라 불러 그 충성을 치하하였으며, 그 뒤 이 승전을 기념하여 동채싸움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전설에 따르면 동채싸움의 기원은 고려 초기로 추측된다. 이 전설은 여러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고, 안동에는 삼태사 묘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고 있다.
차전놀이는 연말이 되면 이를 준비하는 모임이 마을 원로들 사이에 있고, 여기에서 새해 상원에 있을 연회에 대한 임원을 선정하고 준비작업에 들어가는 것으로 행하여진다. 우선 사람을 인근 고을에 보내어 동채 만들 재목을 물색하게 된다.
동채는 참나무로 길이 10m 쯤 되는 곧고 튼튼한 나무를 구하여야 한다. 좋은 재목이 물색되면 다시 목수를 보내어 산제를 지낸 뒤 베어서 안동으로 운반을 하는데, 인근의 관원은 자기의 관할구역을 통과하는 데 협력을 한다.
좋은 재목을 구하기 위하여서는 안동고을 뿐 아니라 멀리 영양 · 청송 · 봉화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 동채는 20여 척 되는 두개의 나무를 다듬어 서로 묶어 연결시키고, 아래쪽은 2m 쯤으로 짝 벌린다. 중간에 몽둥이 두개를 가로 대고 그 위에 사람이 올라설 수 있도록 널판때기를 대고 튼튼하게 묶는다.
차전놀이는 정월대보름날에 하기 때문에 마을에서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아이들은 작은 동채를 만들어 정초부터 놀이를 하게 하고 마을 사람들은 동채싸움의 준비를 한다. 차전놀이에는 부녀자는 참가하지 않고 남자 청년과 장년들에 의하여 연희되는데, 양반들은 가담하지 않고 관전만 하였다고 한다.
편가르기는 안동 고을을 동서로 갈라 편성을 하는데, 거주지 위주가 아니라 태어난 곳 위주로 한다. 가령, 지금은 서부에 속하는 마을에 살고 있지만 동부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은 동채싸움 때만은 자기가 태어난 마을인 동부에 소속되어 싸우게 된다.
그래서 한 가족, 부부 사이에도 이때만은 서로 소속이 다르게 된다. 남편은 동부 편에서 싸우고 아내는 서부 편에 가서 응원을 하는 일이 있다. 이처럼 차전놀이는 출생지 위주의 편성이 특징적이다. 놀이장소는 대보름 무렵이어서 농작물이 없기 때문에 넓은 보리밭이나 백사장에서 거행된다.
수백 명씩 편을 짜게 되고 응원하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 수천 명이 모이게 되므로 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싸움에 참가하는 인원은 정하여진 것이 없다.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을 동원하려고 애를 쓰는데 한쪽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대보름날이 되면 동부와 서부는 서로 전의를 돋우기 위하여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돌고 술을 마시어 기운이 나도록 한다. 정한 시간이 되면 동채를 메고 싸울 장소로 열을 지어 행진하여 전투태세로 대열을 정돈한다. 동채를 메고 있는 사람들을 동채꾼이라 하는데, 이들은 동채를 어깨에 메고 있다가 대장의 지휘에 따라 매섭게 전진하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하고 좌우로 회전도 한다.
상대에게 돌격할 때에는 동채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전진하여야 하기 때문에, 앞 동채꾼들은 높이 들어야 하고 뒤 동채꾼들은 아래로 낮추어야 한다. 이러한 동작을 무거운 동채를 메고 민첩하게 하여야 하므로 협동정신과 훈련이 필요하다. 상대편 동채가 쳐들어와서 눌리게 되면 동채가 땅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하여 힘껏 들어야 하고, 때로는 재빠르게 후퇴를 하여 위기를 면하여야 한다.
그래서 동채 앞에는 기운이 센 장정들로 구성된 머리꾼들이 포진을 한다. 머리꾼들은 상대편 머리꾼들이 막는 속을 뚫고 들어가 상대방 동채 위에 올라가 동채를 땅에 닿게 하여야 하기 때문에 억세고 용감하게 행동을 하여야만 한다. 머리꾼끼리 부딪치면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고 서로 돌파하려고 전력을 다한다.
머리꾼들은 팔짱을 끼고 어깨로만 밀 수가 있으며 손을 써서는 안 된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힘으로 밀어 부쳐야 한다. 머리꾼끼리 몇 번이고 격돌하여 상대편의 대열을 돌파할 수가 없을 때에는 후퇴하였다가 다시 전진도 하고 측면에서 공격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럴 때에는 재빨리 머리꾼들이 대열의 위치를 바꾸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 동채꾼들 역시 동채의 위치를 빨리 바꾸어야 한다. 대장은 담력이 세고 신체가 튼튼하며 통솔력이 있는 사람을 선출한다.
대장은 동채 위에 올라 왼손으로 끈을 잡아 떨어지지 않게 하고 오른손으로 지휘를 한다. 오른손을 앞으로 저어 내밀면 전진의 신호이고, 오른손을 뒤로하면 후퇴의 신호이며, 뒤에서 좌우로 흔들면 회전하라는 신호이다. 동채꾼들은 동채를 멘 채 대장의 신호에 따라 민첩하게 행동을 하여야 한다.
대장은 동채 위에서 자기편과 상대편의 포진상태를 판단하여 전진 · 후퇴 · 좌우회전을 지휘하게 된다. 무거운 동채를 메고 싸우는 것이기에 부상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어, 쓰러진 사람이 있으면 대열을 후퇴시켜 구출하고 상대편의 약점이 보이면 전진을 명령한다. 따라서, 대장은 판단력이 정확하여야 한다. 돌격할 때에 동채 머리는 높이 솟는 것이 유리하다.
동채 머리를 낮추고 전진하다가 상대편 동채가 위에서 덮치면 순식간에 수백 명의 머리꾼들이 동채 위로 뛰어올라와서 그 중량에 견디지 못하고 아래에 깔려 동채가 땅에 닿고 패하게 된다. 동채꾼들은 늘 동채의 상하작용에 유의하고 강한 인내심을 발휘하여야 한다.
승부가 나면 이긴 편은 승리의 기쁨으로 짚신을 벗어 하늘에 던지고 상대편 동채를 뜯어 해체한다. 동채는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짚으로 꼰 새끼줄이 아니라 마사(麻絲 : 베실)나 말총으로 묶지만 이것을 뜯어버린다. 패한 측은 주저앉아 땅을 치고 원통해한다. 승패가 나면 승자는 의기양양하여 동채를 메고 춤추며 시위를 벌인다.
차전놀이는 민속놀이의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를 시사해주고 있다. 첫째는 민간신앙과의 관계이다. 동채 제작에 쓸 나무를 벨 때에 임원들 일동은 목욕재계하여 마음과 몸을 정하게 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정함이 없어야 한다. 상중이거나, 아내나 며느리가 아이를 낳거나, 살생을 하였거나, 부정한 일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선정한 나무 주변에는 금줄을 쳐서 신성함을 표시하고 무단으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며, 베기에 앞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을 담당하고 있는 신에게 나무를 벨 것을 고하고 양해를 얻는 셈이다. 산신의 노여움을 사면 나무를 베거나 운반할 때에 사람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생기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헌주(獻酒)하고 축문을 읽어 신의 뜻을 얻도록 한다. 농경의식과 관계되는 민속놀이의 경우 그 해의 농사의 풍흉을 예축(豫祝 : 미리 기원함.)하고 점치는 경우가 많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춘천이나 가평에 있었다는 차전은 일년 농사를 점쳤다고 하나, 현재 안동의 차전놀이에서는 점복적(占卜的)인 현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농경의식의 집단놀이인 줄다리기나 고싸움에 있어서 농사의 풍흉을 점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채싸움도 원래에는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는 강한 협동성이다. 차전놀이에 필요한 경비는 막대한데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기꺼이 염출(捻出 : 짜 냄.) 되어 왔다.
운반에 소요되는 비용이며 대보름날 당일에 필요한 주식대 등은 마을 부유층의 기부로 충당되는 등 협동에 의하여 행사의 진행이 가능하였다. 소속원들은 기꺼이 참여하였고, 고되고 힘들며 위험성도 있는 놀이였으나 단결을 과시하고 협동을 하였다.
놀이의 진행에 있어 단결 없이는 많은 집단이 행동의 통일을 이룰 수가 없으며 호흡을 같이 하는 협동정신이 강하여야 하였다. 일사불란한 행동통일은 차전놀이에 있어 가장 필수의 일이다.
셋째는 상무정신의 함양이다. 차전놀이는 당당하고 씩씩하고 호탕한 놀이이다. 용감하게 상대편을 파헤치고 들어가야 하고 지혜롭게 대결하는 한편, 대장의 지휘에는 절대로 복종하는 진취적인 민속놀이이다.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끼고 싸워야 하는 규칙을 어기지 않고 실천하며, 화랑의 고장에서 그 상무정신을 계승한 듯 당당한 모습이다.
넷째는 흥겨운 오락성이다. 사람을 모으기 위하여 풍물을 치고 싸움할 때에는 자진머리를 격렬하게 치며, 놀이가 끝나고 승리를 거두면 또 한번 흥겹게 농악소리가 울린다. 농촌에서의 농악은 집단이나 개인을 흥분시키고 즐겁게 한다. 농악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을 춤추게 하고 외침소리를 내며, 흥에 도취된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은 오락성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안동고을 안이 떠들썩하게 수천 명이 모여 이처럼 큰 행사를 치를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즐거이 참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땀을 흘리며 동채를 메고, 살이 벗기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머리꾼으로 뛰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좋아서 스스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에게 있어 한번 참여해볼 만한 즐거움이 있었기에 고통을 당하면서 참여하였다.
소수의 인원으로서는 놀이를 할 수 없으나 대규모의 집단놀이로서는 한판 내고 즐길 수 있는 민속놀이이다. 이 놀이는 1922년경 일제의 억제로 중단되었으나, 1966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안동고등학교학생에 의하여 소개된 이래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안동차전놀이보전회가 그 보존과 계승에 힘쓰고 있으며, 기능보유자로 이재춘(李載春 : 차전지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