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덕왕 때 충담(忠談)이 화랑 기파랑(耆婆郎)을 추모하여 지은 10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2 기이편(紀異篇) 제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條)에 실려 전한다.
창작경위
『삼국유사』에 전하는 다른 시가에 비하여 부대설화(附帶說話)가 자세하지 못하다. 단지 경덕왕이 “…… 대사의 <찬기파랑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으매, 충담이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왕이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를 지어라.”고 하여 충담이 <안민가>를 지었다는 기록만으로 이 시가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원 가사를 양주동(梁柱東)은 다음과 같이 읽었다.
이 노래의 원문과 그 해독 및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① 원문
咽烏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攴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肸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攴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② 해독 및 현대어풀이
열치매 낟호얀 ᄃᆞ리 흰구름 조추 ᄯᅥ가는 안디하
새파ᄅᆞᆫ 나리여ᄒᆡ 기랑의 즈ᅀᅵ 이슈라
일로 나릿 ᄌᆡᄫᅧᄒᆡ 낭ᄋᆡ 디니다샤온 ᄆᆞᅀᆡᄆᆡ ᄀᆞᇫᄒᆞᇙ 좇누아져 아으
잣가지 놉허 서리 몯 누올 花判이여. (양주동 해독)
또 최근 유창균(兪昌均)은 “목며울 이르며/나남 사난 ᄃᆞ라리/ᄒᆡᆫ 구룸 조추 ᄠᅥ간 므스기하/몰개 ᄇᆞᄅᆞᆫ 믈서리여귀/올ᄆᆞᄅᆞ의 즈시 이시소라/일오 나릿 ᄌᆞ갈아ᄒᆡ/ᄆᆞᄅᆞ야 디니기 ᄀᆞᄐᆞ시온/ᄆᆞᄉᆞᄆᆡ ᄀᆞᄉᆞᆯᄒᆞᆯ 좇ᄂᆞ라며/아라! 자싯 가지 그기 고비/눈이 모ᄃᆞᆯᄂᆞ올 花判이라. ”라 해독하고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슬픔을 지우며 나타나 밝게 비친 달이/흰 구름을 따라 멀리 떠난 것은 무슨 까닭인가/모래가 넓게 펼쳐진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거기에 있도다/깨끗하게 인 냇물의 자갈에/郞이여! 그대의 지님과 같으신 마음의 가운데를 따라 가고자 하노라/아! 잣나무의 가지가 너무도 높고 사랑스러움은/눈조차 내리지 못할 그대의 殉烈이로구려(殉烈과 같구려)(유창균 풀이)
흰 구름으로 가렸던 하늘이 열리매 파란 하늘에 나타나는 달은 오히려 흰 구름을 따르고 있는 것 같다. 하늘로 향했던 시선이 아래로 향하니 새파란 나리에 기랑의 모습이 있다. 하늘의 달은 나리에 있는 기랑의 모습이다. 파란 하늘과 새파란 나리에 언제나 살아 있는 기랑을 이 시의 화자(話者)는 그 마음의 한 끝이라도 닮아가고자 한다. 그러면서 서리도 내리지 못할 잣가지와 화판(花判)으로 비유하여 기랑을 찬미하고 있다.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죽음으로써 그 죽음을 초탈하여 영원한 삶을 획득한 것이 기랑이다. 이것은 단지 세속적인 삶만을 추구하는 현실세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충담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혼란한 어떤 사회 현상만의 부정이 아니고,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세속적인 자아를 초탈할 때 진정한 자아를 획득하는 것과 같다.
구원(久遠)의 달과 심중(深重)한 삶의 물에 자리한 기랑의 모습, 그리고 화판으로 불린 기랑은 결국 하나로 묶어질 수 있는 이미지로 흰 구름과 자갈 서리로 묶어질 수 있는 세속과는 대극(對極)에 자리하고 있는 영원한 삶을 표상하고 있고, 그것이 바로 기랑인 것이다.
양주동(梁柱東)은 경덕왕 때 충담이 낭도 기파랑을 찬양한 노래로 그 뜻이 고매하여 당시에 훤전(喧傳:여러 사람의 입으로 퍼져서 왁자하게 됨)되었다고 하면서, 불교문학의 견지에서 그 탁월함과 고차성(高次性)을 찬양하였다. 김동욱(金東旭)은 불교찬송가 곧, 향찬(鄕讚)으로 보고, 기파랑의 사후재식(死後齋式)에서 올린 불찬가(佛讚歌)로 봄이 옳다고 하였다. 김종우(金鍾雨)는 기파랑을 불전설화(佛典說話) 중의 기파(耆婆)와 연관짓고, 또 이 작품을 표훈대덕과도 연결지었다.
왕사성 비극(王舍城悲劇)의 설화에 기파는 인간계에서뿐만 아니라 신의 세계에서도 충신으로 알아 주는 인물이었으니, 그는 신과 사람 두 세계에서 존앙을 받는 존재인데 이런 의미에서 신라의 기파랑이라는 인물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그도 역시 신과 사람 두 세계에 통한 인물로, 바로 당시의 표훈대덕이 아니었을까 추측하였다. 불전 중에 있는 기파의 생활에 절실히 감동한 충담이 그를 신라식으로 이상화하여 찬양한 노래가 이 작품이라고 생각하였다.
최철(崔喆)도 표훈대덕의 기록과 연관지어 결국 <찬기파랑가>는 장래 출생할 왕세자를 위한 발원으로서, 그 대상을 기파랑의 인격에다 견주었던 점을 강조하면서 이 작품의 성격을 한 인물을 찬미한 영웅시가와 같이 보고, 종교 의식의 속박을 벗어난 서정시가로 규정하고 있다.
박노준(朴魯埻)은 경덕왕대의 시대상과 화랑을 연관지어 이 작품의 제작 모티프에 기랑을 찬양하고자 하는 의도가 원천적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거기에 가탁(假托)하여 충담은 그 무렵 쇠퇴·약화 일로를 걷고 있는 화랑단의 형세를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미련과 아쉬움, 화랑단의 재생을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짓게 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이 작품에 반사되어 있는 화랑의 모습은 무사의 용모가 아닌, 선비적·구도자적·성자적인 면모였다고 하였다.
김승찬(金承璨)은 바로 왕도의 실현을 바라는 사회 욕구가 비등하고 있던 경덕왕대를 병든 시대라 규정하고, 그 고통과 고뇌를 치유할 인물은 불전설화에 나오는 기파와 같은 인물의 화랑밖에 없다고 생각한 충담이 그에 대한 찬양의 노래를 지은 것이 이 작품이라 하였다.
이 노래는 읽기조차 어렵고, 사연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실체에 접근하기가 어려워 활발한 논의가 이어지지 않는다.
충담은 기랑이 세속적인 삶을 부정, 초극하여 영원한 삶을 획득한 것으로 그렸다. 그의 종교의 신념뿐 아니라 부정되어야 할 사회현실을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자(死者)를 찬양한 노래로, 그 사자가 구원의 삶의 영상으로 눈앞에 있다는 것은 현실 부정으로, 그러한 영상을 상징적 어법으로 노래하였다.
이 노래에서 찬양된 기랑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불릴 수 있는 숭고하고 장엄한 신의 송가(頌歌)이던 것이 한 인간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뀔 때, 이는 사회적 차원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사회와 대상에 대한 강력한 정서가 복합적으로 담기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