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는 아이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르는 노래다. 전래동요와 창작동요로 나뉜다. 전래동요는 놀이를 기준으로 혼자나 여럿이 놀 때 부르는 노래, 누군가를 놀리면서 부르는 노래, 무언가를 바랄 때 부르는 노래, 그리고 재미 삼아 부르는 노래로 분류할 수 있다. 창작동요는 동시·동화·동극과 더불어 아동문학에 속한다.
동요의 바탕에는 단순 · 보편성 및 이상(理想)과 몽환(夢幻)이 담긴 낭만주의적(浪漫主義的) 요소와 함께 윤리성 · 교육성으로 집약되는 인도주의적 요소가 있다. 동요는 언제 누가 지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채 전래하여 온 전래동요(傳來童謠)와, 어른이 어린이들을 위해 창작한 창작동요(創作童謠)로 나뉜다. 전래동요는 민요(民謠) · 설화(說話) · 속담(俗談) 등과 더불어 구비문학(口碑文學)에 속하며, 내용은 자연의 변화를 노래한 것이 많고, 즐겁게 놀면서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전래동요는 말과 귀로써 전해지는 공동 참여의 문학으로, 노래 또는 중얼거리는 말로써 구연(口演)됨에 비해, 창작동요는 개인의 창작으로, 문자를 통해 발표되고 어린이나 동심을 지닌 어른들에 의해 읽히거나 노랫말로 불린다. 창작동요는 일단 발표되면 그대로 고정되지만, 전래동요는 아득한 세월을 쉼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傳承)되고 여러 지방으로 전파되어 나가는 사이에 그 시대나 환경에 맞도록 일부 개작되기도 한다.
동요는 구비문학 가운데에서도 노래라는 점에서 민요와 그 성격이 비슷하므로 넓은 뜻의 민요에 포괄되기도 한다. 다만 민요는 서민의 생활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들의 실생활과 밀착되지만, 어린이들의 꿈을 노래하는 동요는 서민의 현실 생활을 노래하는 데 역점(力點)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바탕이 서로 다르다.
동요는 전래동요와 창작동요로 나눌 수 있다. 전래동요는 놀이를 기준으로 혼자나 여럿이 놀 때 부르는 노래, 누군가를 놀리면서 부르는 노래, 무언가를 바랄 때 부르는 노래, 그리고 재미 삼아 부르는 노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놀리며 부르는 노래로 이가 빠진 아이를 놀리면서 부르는 노래, 재미로 남을 놀리면서 부르는 노래 등이 있다. 아이들은 구경거리, 외모의 변화를 발견하고 그 대상을 놀리려고 이 노래들을 부른다.
먼저, 아이의 외모를 놀리는 노래다. 아이들이 평소와 다른 외형적 변화를 보고 그 인상에 대한 시각적 느낌을 노래로 표현한다. 「앞니 빠진 아이 놀리는 노래」 · 「빡빡머리 놀리는 노래」 · 「곰보 놀리는 노래」 · 「버짐 난 아이 놀리는 노래」 · 「이에 물린 아이 놀리는 노래」 등이 있다. 먼저, 「빡빡머리 놀리는 노래」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중 중 대깨중 / 칠월이 번개중 / 소맷독에 빠진 중 / 대꼭지로 건진 중(전라북도, 『한국구전동요』)
위 노래는 빡빡머리를 ‘중’에 비유하고, 각 구절이 ‘중’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재미를 더하기 위해 중의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함께 ‘중’과 연관 지어 ‘소맷독’ · ‘대꼭지’과 같은 사설을 노래했다.
「이 빠진 아이 놀리는 소리」는 앞니가 빠진 아이를 놀리면서 부르는 노래로, 전체 놀림유희요 중 가장 많이 조사되었다. 관련 자료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앞니 빠젼 갈가지 / 뒷도랑에 가지마라 / 붕어새끼 놀린다(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전옥녀(1939년생), 『한국민요대전: 강원도민요해설집』)
위 인용문에서는 이 빠진 아이를 앞니 빠진 갈가지로 지칭하고, 붕어새끼가 놀라니 뒷도랑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 이처럼 아이에게 지시하고 그 이유를 제시하는 형태가 가장 많은데, 자료에 따라 직설적으로 명령하거나, 보상을 제안하기도 한다.
놀리면서 부르는 노래 중에는 아이의 행위를 놀리는 자료도 있다. 「오줌싸개 놀리는 노래」 · 「고자질하는 아이 놀리는 노래」 · 「우는 아이 놀리는 노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오줌싸게 놀리는 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야 오줌싸개 똥싸개 소문 내 보자 / 오줌싸개 똥싸개 소문 내 보자 / 이야 오줌싸개 똥싸개 소문 내 보자 / 저애 챙이 덮어 씨고 소금 꾸러 가네(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2리 하리 김팔례(1931년생), 『한국민요대전: 경북민요해설집』)
위 인용문은 오줌싸개 · 똥싸개라고 소문내자는 내용이 반복되었다. 소금을 얻으러 가는 상황 묘사와 함께 오줌싸개 · 똥싸개를 같이 노래함으로써 구연 목적을 강화하였다.
성인을 놀리는 노래는 「봉사 놀리는 노래」 · 「장사꾼 놀리는 노래」 · 「뒷집 영감 놀리는 노래」 등이 있다.
「장사꾼 놀리는 노래」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독장사는 독을 지구 독두판사 나가신다 / 사발장사는 사발을 지구 사부랑 살짝 넘어가구 / 접시장사는 접시를 지구 해발족해발족 나간다 / 종발장사는 종발을 지구 종잘종잘 나가신다 / 양푼장사는 양푼을 지구 부자집 골목만 찾아가구 …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3리 고을출, 『한국민요대전: 충북민요해설집』)
위 인용문에서는 독 장사 · 사발 장사 · 접시 장사 등을 나열하면서, 각 장사에 따른 행동을 음운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묘사하였다. 아이들은 마을로 물건을 팔러 온 장사꾼의 뒤를 따라다니며 위 노래를 불렀다.
두 번째로 놀며 부르는 노래는 놀이를 하기 위해 아이들을 모을 때 부르는 노래, 술래가 숨바꼭질하기 전 혹은 아이들을 찾으면서 부르는 「숨바꼭질노래」, 교대로 다리를 뻗고 앉아서 손으로 다리를 세면서 부르는 「다리세기노래」, 어깨동무하고 가면서 부르는 「어깨동무노래」,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어깨를 팔로 짚고 땅만 보고 뒤따르며 부르는 「뒤따르기노래」, 수영하고 난 후 햇빛에 몸을 말리며 부르는 「몸 말리기 노래」, 방 안에서 종지 돌리기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종지 돌리기 놀이 노래」,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부르는 「가위바위보노래」, 마주 보고 짝 맞추어 손뼉 치면서 부르는 「손뼉치기노래」, 기차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기차놀이노래」, 흙이나 모래로 장난하면서 부르는 「흙장난노래」, 젖은 모래 속에 손을 넣고 위를 두들기며 부르는 노래, 소꿉장난하면서 부르는 「소꿉장난노래」, 풀로 각시 인형을 만들며 부르는 「풀각시 만들기 노래」 등이 있다.
먼저, 숨바꼭질하며 부르는 노래는 아래와 같다.
꼭꼭 숨어라 / 머리카락 보인다 / 꼭꼭 숨어라 / 옷자랙이 보인다 / 꼭꼭 숨어라 / 발꿈치기 보인다 / 꼭꼭 숨어라 / 가마이 뒤에 숨어라 / 꼭꼭 숨어라 / 장똑 뒤에 숨어라 / 꼭꼭 숨어라 / 머리 우가 보인다 / 꼭꼭 숨어라 / 잘 알아 숨어라(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중기2리 정말순(1928년생), 『한국민요대전: 경북민요해설집』)
술래인 가창자는 이 노래를 부른 뒤 숨은 아이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위 인용문은 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다음으로, 「대문놀이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어는 대문을 들어가꽁 / 서울 남대문 열었네 / 몬 들어가겄네 몬 들어가겄네 / 쇠가 채아서 몬 들어가겄네 / 한양 말씸이 옹글었네 / 그러나 닦고나 드가 보세(경남 통영군 한산면 용호리 양귀연(1912년생), 『한국민요대전: 경남민요해설집』)
이 노래는 두 아이가 대문 형태를 만들고 나머지 아이들이 줄지어 대문을 통과하면서 부른다. 문을 통과하고자 하는 아이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고, 문지기 역할을 하는 아이들이 못 열겠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래가 끝날 때 지나가는 아이를 잡아서 술래를 시키기도 하고, 잡힌 아이들을 문지기의 허리를 잡고 뒤에 서 있게 하다가 곧바로 다음 놀이를 이어가기도 한다.
아이들이 젖은 모래로 모래집을 지으면서 부르는 노래는 아래와 같다.
까치는 집짓고 / 중은 물 이고 / 까치는 집짓고 / 중은 물 이고 / 까치는 집짓고 / 중은 물 이고 / 까치는 집짓고 / 중은 물 이고(경북 울진군 북면 주인1리 이규형(1924년생), 『한국민요대전: 경북민요해설집』)
아이들이 모래집을 지으며 부르는 노래는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한 손등 위에 모래를 쌓은 후 다른 한 손으로 두드리면서 부른다. 두꺼비에게 헌 집을 줄 테니 새집을 지어 달라고 지시하는 내용(강원도 속초 · 정선, 경기도 여주)과 내 집을 지어줄 테니 네 집을 달라고 청하는 내용(충청남도 당진, 충청북도 보은), 두꺼비 · 까치 · 황새 등 여러 동물의 집을 짓자고 지시하는 내용(경상남도 사천, 전라북도 고창) 등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로 전승된다.
다리세기는 두 사람 이상이 마주 앉아 서로 다리를 엇갈려 끼우고, 손으로 다리를 차례로 짚으며 노래하다가 노래가 끝났을 때 다리가 짚어진 사람의 다리를 빼는 놀이이다. 맨 나중에 다리를 빼는 사람이 다른 놀이의 술래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심부름을 하기도 한다. 두 다리를 먼저 빼는 순서대로 임금 · 말 · 개 등의 지위가 정해지고, 정해진 지위를 이용한 놀이를 하는 예도 있다.
「다리세기노래」는 「이 거리 저 거리 각 거리」 · 「한 다리 두 다리」 · 「한 거리 두 거리」 · 「한 알개 두 알개」 · 「한 알대 두 알대」 · 「한네 만네」 · 「꽁꽁 꽁 서방」 · 「앵기 땡기」 등이 있으며, 그중 「이 거리 저 거리 각 거리」가 가장 많이 조사되었다. 다리세기노래 자료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앵끼땡끼 가마꼭지 올라가다 땡끼 뚱 / 앵끼땡끼 가마꼭지 올라가다 다깨 뚱(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2리 최영옥, 『강원의 민요Ⅱ』)
‘앵기땡기’는 도입부, ‘가마꼭지 올라간다’는 중간부, ‘땡끼 뚱’은 결말부로 나눌 수 있다. 앵끼땡기는 가마꼭지 올라가는 모양을, 마지막의 다깨 뚱은 내려오다 떨어지는 모양을 나타내었다. 노래의 처음과 끝에 의태어를 사용함으로써 행위를 시각화하는 효과가 있다.
「이 거리 저 거리 각 거리」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청사 맹건 도맹건 수무리 박구도박구 가사머리 장도칼(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윤외리 이순이, 『함안의 구전민요』)
위 인용문은 개별 단어들이 자유 연상의 방식으로 나열되었다. 전체적인 의미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음운의 유사성에 의해 각각의 대목이 이어졌다. 「다리세기노래」 중에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 단어들을 나열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여자아이들이 방 안에서 하는 「종지 돌리기 놀이 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돌아간다 돌아간다 종지돌림 돌아간다 / 돌아간다 돌아간다 종지돌림 돌아간다 콩 받어라 콩 받어라 내 콩 받어라 / 콩 받어라 콩 받어라 내 콩 받어라(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장발2리 김종식, 『단양의 민요』)
방 안에서 여자아이 여러 명이 둥글게 앉아 다리를 모으고 위 노래를 부르면서 다리 사이로 작은 접시나 종지 · 반지 같은 물건을 수건돌리기처럼 돌린다. 원 가운데 앉은 술래는 치마에 가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종지를 찾는 데 애를 먹는다.
편을 가르거나, 놀이 순서 혹은 술래를 정할 때는 「가위바위보노래」를 부른다.
감자에 싹이 나서 / 잎이 나서 / 감자 감자 셋 셋 셋(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 김미나(1965년생), 『민초들의 옛노래』)
위 노래는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지역에 따라 ‘잎이 나서’ 이후의 내용이 “묵찌빠(서울)”, “싹싹싹 가위바위보(전라도)”, “훠이훠이훠이 하나 빼기(경기도 평택)” 등으로 불렸다.
「풀각시 만드는 소리」는 여자아이들이 식물의 줄기나 풀로 각시 인형을 만드는 과정에서 머리를 땋거나 옷을 입히면서 불렀던 노래다. 이때 부르는 소리는 아래와 같다.
서방 머린 터박터박 나 머린 멘들멘들(제주도 서귀포시 서귀읍 서호리 이춘임, 『제주도민요연구』)
위 인용문은 풀각시의 머리를 땋으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가창자와 풀각시를 동일시하여 후반부에서 ‘나 머린 멘들멘들’이라고 노래하였다.
흙으로 소꿉장난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아래와 같다.
동독께미 놀이하자 / 동독께미 살림살자 / 돌 찾아서 솥을 걸고 / 흘 파서 밥을 짓자(부산시 동래구 동래읍 교동 홍갑자, 『경상남도지』 하권)
위 노래의 가창자는 같이 노는 친구에게 소꿉놀이하자고 권하면서, 놀이 상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노래가 놀이의 유희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잠자리 꽁꽁」은 아이들이 잠자리를 잡을 때나 잠자리를 쫓을 때, 혹은 잠자리를 따라다니면서 부르는 노래다. 자료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잠자리 꽁꽁 / 저리 가면 죽고 / 이리 오면 살고 / 높이 뜨면 죽고 / 낮추 뜨면 산다(황해북도 개성시, 『조선향토대백과』)
대부분의 잠자리 잡는 소리는 위와 같은 형태로 노래된다. 아이로서는 잠자리가 멀리 가면 안 되기 때문에 잠자리에게 이리 오거나, 낮게 날아야 산다고 노래한다. 자료에 따라 날아가지 말라고 위협하는 내용이 표현되기도 한다.
도구를 이용하여 놀 때 하는 소리는 줄넘기하면서 부르는 「줄넘기노래」, 고무줄을 가지고 놀면서 부르는 「고무줄놀이노래」, 공놀이하면서 부르는 「공놀이노래」, 오자미를 가지고 놀면서 부르는 「오자미놀이노래」 등이 있다.
세 번째로 무언가를 소망하는 노래는 해가 나오라고 부르는 노래, 비 오지 않기를 바라며 부르는 노래, 새로운 이가 나길 바라며 부르는 노래 등이 있다. 이들 노래 중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부르는 노래는 아래와 같다.
비야 비야 오지 마라 / 우리 성님 시집간데 / 분홍치마 얼룩진다(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화곡리 버드내 심영란(1937년생), 『한국민요대전: 강원도민요해설집』)
비가 오면 밖에서 놀지 못하므로, 아이들은 처마 끝에 앉아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위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대부분 시집가는 누나 혹은 언니의 분홍치마가 얼룩지거나, 타고 가는 가마에 비가 새면 안 되기 때문에 비가 오면 안 된다고 한다.
다음으로, 이가 빠졌을 때 빠진 이를 지붕 위로 던지면서 부르는 노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깐치야 깐치야 헌이 주께 새이 나도가 깐치야 깐치야 헌이 주께 새이 나도가(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이재남, 『영동의 민요』)
위 인용문은 까치에게 헌 이를 줄 테니, 새 이를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까치는 눈 티 없애는 소리에서도 아이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네 번째로 재미 삼아 하는 노래 중에는 「가자 가자 감나무」가 있다. 관련 자료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가자가자 감나무야 / 오자오자 옷나무야 / 사리 밑에 옷나무야 / 니가 없어 못놀겠다 / 내엘모래 장에 가서 / 돌문둥이 하나 얻어 줄게(경상남도 마산시 진해구 웅천동, 『우리 고장 문화유산』)
위 인용문에서 화자(話者)는 같이 놀고 싶은 옷나무를 위해 내일 모레 장에 가서 돌문둥이를 하나 얻어 오겠다고 하였다. 첫 번째 구절은 노래를 시작하기 위한 도입부 역할을 하였다. 위 노래는 대부분 여러 가지 나무를 나열하며 말머리를 잇거나 뜻을 가져와 뒷말을 붙이는 방식으로 구연된다.
창작동요는 동시(童詩) · 동화(童話) · 동극(童劇) 등과 더불어 아동문학(兒童文學)에 속한다. 개인의 창작물로, 어린이나 동심을 지닌 어른들에 의해 읽히거나 노랫말로 활용된다.
한국 창작동요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1923년 방정환(方定煥)이 처음으로 주장한 어린이 문화운동이 색동회에 의해 전개되자, 윤극영(尹克榮)은 색동회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빼앗긴 이 땅의 어린이에게 “아름다운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동요를 창작하여 어린이로 하여금 부르게 하자.”라고 주장하며, 노래 단체인 ‘따리아회’를 서울에서 조직하였다.
창작동요의 시작은 1924년에 발표된 「반달」이다. 이 노래가 나오기 이전에는 창가(唱歌)라고 하여, 찬송가나 일본식 곡조에 우리말을 적당히 지어 붙여 젊은이 · 어린이 구별 없이 불러 왔다. 그러다가 「반달」이 발표되면서 예술가곡(藝術歌曲) · 대중가요(大衆歌謠), 그리고 동요로 확실한 구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방정환의 「늙은 잠자리」(1924), 윤극영의 「반달」(1924), 유지영(柳志永)의 「고드름」(1924), 박팔양(朴八楊)의 「까막잡기」(1924), 한정동(韓晶東)의 「따오기」(1925), 서덕출(徐德出)의 「봄편지」(1925), 윤석중(尹石重)의 「오뚜기」(1925), 이원수(李元壽)의 「고향의 봄」(1926) 등은 한국 현대 아동문학 성립기의 작품이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를 동요의 개척 시대라고 한다면 1931년부터 1939년까지는 동요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현제명(玄濟明)이 「가을」 · 「고향생각」을 작곡하고 이흥렬(李興烈)이 「꽃동산」 · 「나비나비 흰나비」를 비롯한 수많은 동요를 창작하였다. 또한 김동진(金東振)과 강신명(姜信明) · 박태현(朴泰鉉)은 평양에서 동요 작곡에 주력하고, 이일래(李一來)는 마산에서, 권태호(權泰浩) · 김성태(金聖泰) · 김성도(金聖道) · 유기흥(柳基興) · 원치승(元致升)은 서울에서 동요 창작에 몰두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요는 양적인 팽창을 이루며 시(詩)의 성질을 가미한 예술적 동요의 창작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유도순(劉道順) · 윤복진(尹福鎭) · 신고송(申孤松) · 김태오(金泰午) · 강소천(姜小泉) · 박영종(朴泳鍾) · 권오순(權五順) 등 시인들에 힘입어, 광복기에 이르기까지 동요는 한국 아동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1932년에 나온 『윤석중 동요집』은 한국 최초의 창작동요집이었으며, 이어 김태오의 『설강(雪崗)동요집』(1933) · 강소천의 『호박꽃 초롱』(1941) 등 동요집이 출간되었다. 방정환의 동요는 애상적(哀傷的)이었고, 윤석중 · 윤복진 · 강소천 등은 순수 동심주의를 지켰으며, 이원수는 초기부터 사회 저항으로 일관하였다.
학교와 가정에서 동요가 보급 · 애창되기 시작하자, 일제는 당황하며 1940년 초부터 우리말 말살 정책을 펴는 등 군국주의적인 태도로 나왔다. 일제는 우리 동요의 가창을 금지하며, 학교나 방송에서 일본 군가나 국민가요(國民歌謠)만을 가르치도록 강압 정책을 펴 나갔다. 이 시기를 동요의 암흑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창작 · 발표된 우리 동요는 단 한 편도 없다.
광복되자 묻혀 있던 우리 동요가 되살아나고, 새로운 기풍의 동요가 속속 창작되었다. 박태준(朴泰俊) · 윤극영 · 정순철 등 개척 시대의 작곡가들이 다시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병원(安丙元) · 권길상(權吉相) · 정세문(鄭世文) 등 젊은 음악도들이 어린이의 노래 지도에 정력을 쏟는 한편, 동요 작곡에 힘을 다하였다. 박재훈(朴在勳) · 장수철(張壽哲)도 광복 직후부터 6 · 25사변 전까지 상당히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광복 이후 혼란기에 나온 권태응의 동요집 『감자꽃』(1948)과 윤복진의 동요집 『꽃초롱꿈초롱』(1949)은 기념할 만한 작품이었다. 특히 권태응의 동요는 사소한 것에서 동심적 진리를 포착해 낸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광복 후에는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담은 동요가 많이 작곡되었다. 6 · 25사변에 동요는 승전 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정서 순화를 위한 서정동요와 예술동요(藝術童謠)가 많이 작곡 · 애창되고 있다.
6 · 25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면서 동요는 주류의 자리를 동시에 내어주게 된다. 동요 시인들이 정형시(定型詩)인 동요보다는 자유시(自由詩)인 동시에 문학적 역량을 실으려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1960년대에 와서는 신춘문예(新春文藝)에서조차 동요를 현상 모집하지 않게 되었고, 응모자도 없게 되어 작가의 역량 평가에서 제외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동요는 음악에 예속(隷屬)되어 노랫말의 역할만 맡게 되었다. 이런 시류(時流) 속에서도 어효선(魚孝善) 등은 동요 문학의 부흥에 애써 왔고, 신현득(申鉉得) · 김종상(金鍾祥) · 엄기원(嚴基元) 등이 동요집을 엮어내기도 하였다.
1983년부터 시작한 MBC 창작동요제(創作童謠祭)는 초기에는 일선 학교 교사들이 창작한 동요를 대상으로 하였다. 여기서 발표된 동요 중 상당수가 현재 어린이들 사이에서 널리 애창이 되고 있으며, 또 많은 곡이 음악 교과서에 수록이 되어 한국 동요의 주류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국립국악원 주최 ‘국악동요제’에서도 수백 편의 국악동요(國樂童謠)가 발표되었고, 그중 10여 곡이 음악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