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팔극(八克). 버들쇠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1913년 선린중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다니던 도중에 음악전문학교로 전학하였다. 그곳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매일신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동했다. 기자로 재직하면서 동요와 동화를 쓰기 시작했고, 희곡도 발표하였다. 이서구, 이익상, 최독견, 심훈 등 일간지 학예부 기자들과 함께 기자 친목단체인‘찬영회(讚映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영화평을 써서 영화와 관객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했는데 간혹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 영화 제작자들로부터 큰 접대를 받아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1927년 조선소년운동협회 어린이날준비위원회의 선전부 위원이 되었다. 1928년 ‘찬영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영화와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8.15 광복 후 정치에 참여하였는데 2년 후 병사하였다.
1919년에 첫 창작희곡 「이상적 결혼」을 써서 동경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 『삼광』1호∼3호에 나누어 실었다. 이 희곡은 주인공 애경이 부모의 원만한 이해 하에 ‘간선(揀選)’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맞는 배우를 선택한다는 내용이다. 작가가 이 희곡을 ‘속가희극(俗歌喜劇)’이라 표현했듯이 세 편의 노래를 포함하고 있고 극의 리듬이나 내용이 매우 경쾌한 편이다. 1920년 『서광』 2호에 평문 「조선과 예술」을 발표하였다. 1924년 2월 『어린이』에 「고드름」을 썼는데, 윤극영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이 무렵 그는 「동요를 지으시려는 분께」, 「동요 짓는 법」 등을 『어린이』에 발표하여, 당시 생소했던 동요의 개념과 작법을 독자들에게 가르쳤다. 1926년 2월 「황수선(黃水仙) 된 소녀」라는 번역동화를 『동아일보』에 실었고, 6월 『조선문단』에 민요 「꿈」을 발표했다. 1930년 『조선동요 백곡집』에 「속임」, 「고드름」 등이 실렸다. 그밖에 동요로 〈봄이 오면〉, 희곡으로 「연과 죄」가 있다. 그의 「고드름」은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여 이전의 딱딱한 창가의 굴레를 벗어나 예술동요의 새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