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지나 학력 등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20년대 말부터 카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카프 연극부의 비대중성, 인텔리적 경향, 조직의 비효율성, 연극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대책의 부재, 중앙과 지방의 프로극단을 유기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의 부재 등을 비판하면서 카프의 연극부를 전문가 조직에서 노동자 농민 중심의 대중조직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는 비평활동을 펼쳤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다가 월북하였는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월북문인 해금 조치 이후 연구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민병휘는 1928년을 전후하여 연극 대중화 논쟁에 가담하면서 프로문단에 본격 등장하였다. 1931년 3월 개성에서 프로연극 단체인 대중극장(大衆劇場)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이곳의 제1회 공연작품으로 「젊은이들」, 「마리아와 아들」, 「마도로스와 위트레스」 등을 직접 썼다. 그해 7월에는 노동자 농민 대중잡지를 표방한 카프의 기관지 ‘군기(軍旗)’를 창간하는 데 적극 개입했다. 2차 방향전환 이후 카프 집행부의 미온적 태도를 맹비난하다가 제명당하는 이른바 ‘군기(軍旗)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작품론과 작가론에 많은 관심을 쏟았으며, 번역극 문제를 둘러싸고 극예술연구회의 김광섭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카프 개성 지부에 소속되어 있던 민병휘는 카프 중앙 집행부에 대한 비판을 통해 연극 대중화의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이동식 소형극장 활동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시도하였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연극은 “노동자 농민의 동지의 손으로 되는 것”이어야 하며, “노동자 농민들 속에서 상연되어 그들을 계급전선으로 진출케 할 효과를 주는 것”이어야 의의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일제의 검열과 탄압을 피해 노농 대중을 위한 연극을 만들기 위한 현실적 실천적 고민의 표출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주요 평론으로는 「조선 프로예술운동의 과거와 현재」(1930), 「예술의 대중화 문제」(1930), 「연극 비판에 대한 태도」(1931), 「연극만화」(1931), 「박영희론」(1933), 「김기진론」(1934), 「민촌 ‘고향’론」(193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