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기의 필명은 김명희.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정현(金定鉉)은 황해도 지역에서 군수 및 조선총독부 중추원 조사과 촉탁직으로 근무했다. 그때 김영건은 해주고등보통학교를 잠깐 다니다 서울로 전학했다. 1927년 3월에 경성제이공립고등보학교를 졸업했다.
1928년 『무산자』에 소설을 게재한 것으로 보아서 이 무렵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1년 무렵부터 베트남 하노이에 소재한 프랑스 원동학원의 도서관 사서로서 일본과 한국의 자료를 관리하고 연구했다.
1940년 일본군이 베트남 하이퐁을 점령할 무렵, 김영건은 베트남을 떠나 일본으로 옮겼다. 그후 『민족학연구』에 글을 발표하면서 ‘일본민족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 귀국하여 ‘진단학회’ 회원들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대외관계사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1946년 제1회 조선전국문학자대회의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회에서 「세계문학의 과거와 장래의 동향」을 보고하였다. 1947년 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 문화예술단체를 연합하여 결성한 ‘전국문화단체총연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1948년 이후 정치상황의 변화로 조직 활동이 여의치 못하게 되자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6년 7월에 「안남유기」 7편을 동아일보에 게재했다. 여기에는 베트남의 문단 상황을 논하는 「안남의 문단」과 하노이와 주변 지역의 역사를 다룬 「안남의 고도」 등이 포함되어 있다. 1937년 『한글』 4월호에 「안남 하노이 통신」을 게재하여 고국에 자신의 활동을 보고하기도 하였다. 이후 베트남 체류 시절에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베트남-일본 관계사 분야에 관한 글들을 발표했다. 1942년 일본 동경에서 『일 · 불 · 안남어 회화 사전』을 펴냈다.
1945년 『문화전선』에 「세계문화의 동향」을 발표하면서 외국문학의 비판적 섭취와 그를 통한 민족문학 건설 방안을 모색하는 데 집중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47년 5월 『진단학보』에 논문 「제7∼13세기의 남해제국」을 번역 소개했다 1947년 백양당에서 평론집 『어록』을 펴냈고, 1948년에는 서울출판사에서 『문화와 평론』을 펴냈다. 또한 1948년 『여명기의 조선』을 펴내 10년간 베트남 현지에서 외국학 연구를 통해 얻은 다양한 경험을 ‘조선학’ 정립에 적용해 보려 했다.
해방기에 발표한 주요한 평론으로는, 「농촌계몽운동에서의 일제안」(1946), 「외국문화의 섭취와 민족문화」(1946), 「국제문학의 정세에 관한 보고」(1946), 「역사문학의 봉건적 성격」(1946), 「민족문학의 골수」(1947), 「소비에트 문학의 발전과 제 문제」(19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