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6일: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이 통합성명을 발표하고 가칭 조선문학동맹 결성.
1945년 12월 13일: 통합 결성식을 통해 두 단체의 통합을 공식화.
1946년 2월 8일∼9일: 「전국 문학자 대회」를 개최하고 명칭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변경해 정식 출범을 선언.
1946∼1948년 기관지 『문학』발행. (통권 3권은 몰수, 5, 6권은 제한 부수 발간, 통권 8호까지 발행)
좌익 문인들을 총망라하여 조직된 〈조선문학건설본부 〉는 〈카프 〉 시절과는 달리 계급 대신에 민족을 앞세웠고, 그에 따라 문학이념으로 민족문학을 제시했다. 〈조선문학건설본부 〉의 불분명한 계급적 성향에 불만을 품은 한설야, 이기영, 윤기정 등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조직해 계급적 지향이 뚜렷한 문학운동을 추진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통합 요구에 따라 〈조선문학건설본부 〉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은 1945년 12월 6일 통합성명서를 발표하고 가칭 〈조선문학동맹 〉을 결성했다. 두 단체의 통합은 일주일 뒤인 12월 13일 통합 결성식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1946년 2월 8일부터 이틀간 열린 「전국 문학자 대회」에서 가칭이었던 〈조선문학동맹 〉을 〈조선문학가동맹 〉으로 변경하고 정식으로 〈조선문학가동맹 〉(이하 〈문맹 〉)이 출범했다.
「전국 문학자 대회」는 〈문맹 〉의 조직과 강령 등을 구체화하고 문학운동의 구심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문학자 대회」에서 발표한 「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관한 일반보고」에서 임화는 식민지 시대부터 민족문학의 수립은 조선문학의 역사적 과제였다며 계급문학운동 또한 ‘계급문학의 형식’으로 표현된 민족문학운동이었다고 해석했다.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으로 조선문학이 독자적 발전을 꾀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해방된 조선사회에서 요구되는 문학은 당연히 반제와 반봉건을 과제로 하는 민족문학이 되어야 한다. 임화는 일제 문화지배의 잔재와 봉건문화의 유물을 청산하는 것이 “조선 민족이 건설해 나갈 사회와 국가의 당면한 과제와 일치하고 공통되는 과제”이기 때문에 문학운동이 조선사회의 근대적 개혁과 민주주의적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건설될 문학은 ‘근대적인 의미의 민족문학이며, 이 민족문학은 “보다 높은 다른 문학의 생성, 발전의 유일한 기초”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민족문학은 사회주의문학의 생성과 발전을 위한 결정적 토대라는 것이다.
〈문맹 〉은 민주주의 민족문학을 문학이념으로 설정한 후 그에 따른 창작방법으로 진보적 리얼리즘을 제시했다. 김남천은 진보적 리얼리즘이 “진보적 민주주의 건립을 역사적 임무로 하는 시대의 유물변증법과 맞물린 리얼리즘”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진보적 리얼리즘이 혁명적 낭만주의를 중요한 내적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민주변혁이란 과제 자체가 “민족의 거대한 꿈과 영웅적인 정신과 함께 정히 민족의 위대한 로맨티시즘”이기 때문이다.
김남천은 진보적 리얼리즘의 특질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진보적 리얼리즘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달성을 민족사적 과제로 하는 시대의 리얼리즘이다. ‘창작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이란 “역사적으로 시대적으로 특정한 경향을 가지고 구체화되는 것”이므로 민주주의 개혁 단계의 리얼리즘의 구체적인 구현형태는 진보적 리얼리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진보적 리얼리즘은 유물변증법을 세계관적 기초로 하는 창작방법이다. 왜냐하면 리얼리즘이란 언제나 세계관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존재하는데, 이때 “현실을 유동성과 발전성에 있어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과학적인 세계관이 유물변증법이기 때문이다. 셋째, 진보적 리얼리즘은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자신의 본질적 계기로 삼아야 한다. 김남천의 진보적 리얼리즘론은 혁명적 낭만주의를 본질적 계기로 삼고 유물변증법을 세계관적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형된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문학자대회 결정서」(이하 「결정서」)는 〈문맹 〉의 활동방침과 강령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결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일본제국주의적 문화지배의 청산, 둘째, 봉건주의 잔재의 청산, 셋째, 국수주의의 배격, 넷째, 진보적 민족문학의 건설, 다섯째, 조선문학과 국제문학의 교류가 그것이다.
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장에 홍명희, 부위원장에 이기영ㆍ한설야ㆍ이태준, 서기장에는 권환이 선출되었다. 〈문맹 〉은 산하에 소설부·시부·평론부·희곡부 등의 위원회를 두었고 서울시 지부를 시작으로 각 도에 지부를 결성했으며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가맹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기관지로는 『문학』을 발행했다.
하지만 1946년 미ㆍ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그에 맞서 문화써클운동, 10월항쟁의 작품화, 문화공작대활동, 구국문학운동 등을 전개했지만 악화된 상황을 만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후 1946년 11월에 예정되어 있던 〈제2회 문학가동맹 회의 〉를 무기한 연기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이병기, 위원으로 양주동ㆍ염상섭ㆍ채만식ㆍ박태원 등을 보선해 ‘대중화’를 새로운 노선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심해지면서 〈문맹 〉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종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