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의주 출생. 의생이며 기독교인이다. 일찍부터 개화에 눈뜬 개화지식인으로 애국계몽활동을 펼쳤고, 한일합병 이후에는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다. 여러 편의 신소설을 남긴 신소설 작가이기도 하다.
1906년 백용호(白用鎬), 박창화(朴昌華) 등 의주의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의주신사회(義州新社會)’를 조직하였다. 의주신사회는 지역민을 대상으로 신학문과 신지식을 가르치고 정치와 법률을 강구하며 자본을 모아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목표를 지닌 계몽 조직이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의주의 유력인사 300여인을 조직하여 ‘의주보민회’를 창립하여 구미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신학문과 신식의 기풍을 조성하려고 노력하였다.
1907년 무렵 서울로 상경하여 국민교육회가 운영하는 사립사범학교를 다니는 한편,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7년 11월 다시 의주로 돌아와 ‘신세계 사진박람원’을 설립하였다. 미국에서 직접 사들인 700환 상당의 사진 장비들로 꾸며진 박람원 내부는 중앙에 커다란 유성기를 설치했는데, 관람객들은 유성기 소리를 들으면서 세계 각국의 자연 풍광과 근대 도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관람할 수 있었다.
1909년 서간도 목민학교를 설립할 때 창립 주무를 맡았고, 이후 교장직을 수행하면서 교사를 증축하고 교원을 추가 초빙하는 등 학교 확장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해 의연금과 찬성금 모금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2년 1월 당시 유일한 지방신문이던 『경남일보』에 신소설 「교기원(巧奇寃)」을 연재한 이후, 2년여 동안 『경남일보』 소설기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편의 신소설을 연재하였다.
『경남일보』 폐간 이후 한동안 자신의 생업이라 할 의약업 분야에 종사하였다. 1910년대 중반에 평양에서 춘포약방을 경영하던 노인규와 함께 의약강습회를 조직하였고, 『의약월보』를 발간하며 공동 주간을 맡았다.
이 무렵부터 중국 안동과 무순, 평남 순천, 평북 정주 등으로 옮겨다니며 은밀하게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1921년 전후의 독립청년단 사건, 1930년 전후의 오산농우회(五山農友會) 사건 등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독립청년단은 독립군 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내거나 독립운동가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던 독립운동 조직으로, 박영운은 여기에서 안동현 방면의 교통원 역할을 수행했다. 오산농우회 사건 때도 만주 방면에서 국내와의 연락을 유지하는 잠행운동을 벌였다는 혐의로 체포된 것을 보면, 박영운은 최소 10년 이상 유사한 방식의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지속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일합병으로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박영운은 신소설로 눈을 돌렸다. 1910년대 초 『경남일보』에 「교기원」(1912)·「옥련당(玉蓮堂)」(1912)·「금산월(金山月)」(1912)·「부벽완월」(1913) ·「운외운(雲外雲)」(1913) 등 5편의 신소설을 연속 연재하였다. 이밖의 작품으로는 단행본으로 출판된 정탐소설 『금지환(金指環)』(동양서원, 1912)과 애정소설 『공산명월(空山明月)』(박문서관, 1912) 등이 있으며, 「옥련당」과 「운외운」도 단행본으로 출간된 바 있다. 박영운은 신소설이 지닌 계몽의 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신소설을 통해 애국계몽활동을 지속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신소설에 대한 관심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1914년 이후에 새로 창작한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박영운 신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이며, 특히 그의 고향인 평안북도 의주는 가장 중요한 공간적 배경을 이룬다. 인물들의 관계는 선악 대립 구조를 이루며, 흥미 위주의 사건 전개가 많아 통속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한편 박영운 신소설의 인물이 친일적이거나 무국적인다운 인간상에 가깝다는 기존의 평가는 그의 애국계몽 및 독립운동 행적과 맞지 않아 새로운 관점의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