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일상적인 생활을 둘러싼 근심과 불안에서 출현하여 고차적인 질서에 속하는 사실들, 도덕적인 삶에 내포되어 있는 진지함과 위험으로부터 도피할 구실을 찾게 하고, 모든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려는 유혹에 빠져들게 한다.
따라서, 통속소설은 불안을 진정시키고 삶 속에서 부딪치는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피하게 해준다. 또 적극적인 자세와 긴장, 비판 및 자기반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대신 소극적인 자세와 자기도취에 몰입하도록 한다. 때로는 편안함과 만족의 수준으로, 혹은 무제한적으로 충일된 감정과 극단적인 센세이션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단순한 기분풀이와 오락은 감각에 아부하고 비판의식을 흐리게 하는 싸구려 감정의 몽상으로, 또는 무모한 정열 속에 숨은 거칠은 속임수 등으로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있어 오락, 긴장해소 및 무목적적이고 심지어 방종스럽기조차 한 유희는 필요불가결하다.
이것은 모두 생활 조건들로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새롭게 하는 데에, 또 약화된 활동력을 자극하고 강화하는 데에 필요하다. 여기에 부응하는 통속소설은 그 이중성격 때문에, 시대와 장소에 따른 수용자의 여건에 의하여 그 가치가 달리 정의될 수 있다.
흔히, 통속소설은 대중소설과 비슷하게 간주된다. 통속소설과 대중소설의 개념에 대해서 평단(評壇)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1939년 유진오(兪鎭午)의 <순수에의 지향(志向)>(문장 1권 5호)이 발표되면서부터이다. 이에 대하여 김동리(金東里)의 <순수이의 純粹異議>, 김환태(金煥泰)의 <순수시비>, 이원조(李源朝)의 <순수는 무엇인가> 등의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결국 안회남(安懷南)의 <통속소설의 이론적 검토>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통속소설의 개념은 아직까지 뚜렷하지 않다. 통속소설과 대중소설을 동일하게 보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구분하려는 경향도 있다. 국문학에서는 대중소설이라는 말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되었다.
1929년 김기진(金基鎭)이 <대중소설론>에서 이를 거론한 것이 처음인데, 그는 대중이라는 말을 노동자와 농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고, 정확한 의미에 있어서 대중소설의 문제는 노동자와 농민의 문제, 즉 그들의 생활문제·취미문제·의식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향파 논자들의 주장은 결국 통속소설이 신문소설 독자를 의식한 가정소설의 성격을 지닌 데 반하여, 대중소설은 노동자·농민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나친 작위성이 잠복해 있다. 정한숙(鄭漢淑)은 <대중소설론>에서 통속성은 어느 면에서 저질성이지만, 대중성은 엄연히 소설문학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요소라는 시각에서 통속소설과 대중소설을 양분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설의 갈래를 순수소설과 통속소설로 구분한다. 그러나 소설의 가치를 규정하는 고정불변의 미학적 척도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시기에나 다양한 감상층에 의하여 좌우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