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는 일제강점기 「담-1927」, 「네거리의 순이」, 「어머니」 등을 저술한 시인으로 평론가이자 문학운동가이다.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했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뛰어들었다. 1928년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하였다. 1929년 「우리 옵바와 화로」 등의 시를 발표해 대표적인 프로 시인이 되었다. 1932년 카프 서기장으로 카프 제2세대의 주역이 되었다. 1935년 카프 해산계를 낸 이후 해방까지의 시집 『현해탄』과 『조선신문학사』를 간행했다. 1920∼1930년대의 프로문학과 해방 직후의 좌익문학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존재이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서울 출생.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던 1926년에는 성아(星兒)라는 필명을, 1928년부터는 임화 · 김철우(金鐵友) · 쌍수대인(雙樹臺人) · 청로(靑爐) 등의 필명을 썼다.
192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에 중퇴하였고,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뛰어들었다.
시 「지구와 빡테리아」 · 「담(曇)-1927」 등이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이 무렵 그는 다다이즘(dadaism)과 프롤레타리아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전위사조에 대한 모방욕이 무산계급문학운동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담-1927」은 서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죽음에 대한 추모의 정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증오심을 표현한 것으로 프로시와 이야기시의 유형에 넣을 수 있다.
1928년에 박영희(朴英熙)와 만났으며, 윤기정(尹基鼎)과 가까이 하면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하였다.
1929년에는 「우리 옵바와 화로」 · 「네거리의 순이(順伊)」 · 「어머니」 · 「병감(病監)에서 죽은 녀석」 · 「우산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등의 시를 써냄으로써 일약 대표적인 프로 시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사상으로 요약되는 주제와 이야기시 또는 단형서사시라는 형식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1930년 일본으로 가서 이북만(李北滿) 중심의 ‘무산자’그룹에서 활동하였고, 이듬해 귀국하여 1932년에 카프 서기장이 되면서 카프 제2세대의 주역이 되었다.
카프 전주사건이 터진 그 이듬해인 1935년에 카프 해산계를 낸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의 임화의 삶은 폐결핵, 시집 『현해탄(玄海灘)』 · 『조선신문학사』 간행, 출판사 ‘학예사’ 운영, 일제 신체제문화운동에 대한 협조 등으로 점철되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문학건설본부’의 간판을 내걸고 많은 문인들을 규합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주최의 제1차 전국문학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1947년 11월에 월북하기 전까지는 박헌영(朴憲永) · 이강국(李康國) 노선의 민전의 기획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월북 후에는 6 · 25까지 조 · 소문화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으로 일하였다. 6 · 25 때는 다시 서울에 왔다가 그 뒤 낙동강 전선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휴전 직후 1953년 8월에 남로당 중심 인물들과 함께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하였다. 당시 그의 옆에는 이원조(李源朝) · 설정식(薛貞植) 등의 문인들이 있었다.
19세부터 시 · 평론을 발표하였던 임화가 남긴 시집으로는 『현해탄』(1938) · 『찬가(讚歌)』(1947) · 『회상시집(回想詩集)』(1947) ·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 등이 있고, 평론집으로는 『문학의 논리』(1940)가 있으며, 편저로는 『현대조선시인선집』(1939)이 있다. 비록 미완으로 그쳤지만 조선신문학사 서술 작업도 꾀한 바 있다.
생전에 80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쓴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한국 현대시사와 비평사 그리고 현대문학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920∼1930년대의 프로문학과 해방 직후의 좌익문학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존재이다. 그는 문학운동사 · 한국 현대문학사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인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