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효봉(曉峰). 서울 출생. 사립 보인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9월에 결성된 염군사에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서울청년회에 소속되어 최승일(崔承一)·송영(宋影)·박영희(朴英熙) 등과 더불어 염군사와 파스큘라(PASCULA : 1923년경에 발족된 프롤레타리아문학단체)를 단일조직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1925년 조선 프로예맹의 서기국장과 중앙위원을 역임하였고 1927년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아나키스트와의 논쟁에 참여하였다. 1931년과 1934년에는 두 차례의 카프 검거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각각 기소유예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광복후 송영·한설야(韓雪野)·이기영(李箕永) 주도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서기장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윤기정의 문단 활동은 소설 창작과 비평 활동으로 크게 대별된다. 그의 소설은 계급문학운동의 이념적인 요구를 기계적으로 반영한 것으로써, 특히 노동자들의 삶의 고통과 착취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린 작품들이 있다.
「새살림」(문예시대, 1927.1.)·「밋치는 사람」(조선지광, 1927.6.∼7.)·「딴길을 걷는 사람들」(조선지광, 1927.9.)·「압날을 위하야」(예술운동, 1927.11.)·「의외(意外)」(조선지광, 1928.4.)·「양회굴둑」(조선지광, 1930.6.)·「자화상」(조선문학, 1936.8.)·「사생아」(사해공론, 1936.9.)·「적멸(寂滅)」(조선문단, 1936.10.)·「거부(車夫)」(조광, 1936.11.)「이십원」(풍림, 1936.12.) 등이 있다.
또한 「거울을 꺼리는 사나이」(조선문학, 1937.1.)·「어머니와 아들」(풍림, 1937.2.)·「공사장」(사해공론, 1937.3.)「아씨와 안잠이」(조광, 1937.7.)·「천재(天災)」(조선문학, 1937.8.) 등이 있으며, 방향 전환 이후의 소설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 단편소설 「양회굴둑」은 이 시기의 평판작이 되었다.
그의 평론으로는 「‘계급예술론의 신전개’을 읽고」(조선일보, 1927.3.30.∼4.2.)·「상호비판과 이론확립」(조선일보, 1927.6.15.∼20.)·「무산문예가의 창작적 태도」(조선일보, 1927.10.9.∼20.)·「최근문예잡감」(조선지광, 1927.10.∼12.)·「당연히 양기해야 할 소위 ‘목적의식성’」(조선일보, 1927.12.11.∼16.)·「이론투쟁과 실천과정」(중외일보, 1928.1.10.∼12.)·「문학적 활동과 형식문제」(조선문예, 1929.6.)·「아지푸로」(대조, 1930.5.)·「문예시평」(대조, 1930.6.)·「반(反)캅푸 음모사건의 진상」(이러타, 1931.6.)·「문화운동의 통일적 조직」(비판, 1932.1.) 등이 있다.
초기 비평의 대표작인 「계급예술론의 신전개를 읽고」와 「상호비판과 이론확립」에서 그는 프로문예의 예술적 완결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스트 김화산(金華山)을 비판하고, 투쟁기에 있어서의 프로문예의 본질은 그 투쟁적 선전적 기능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당시 박영희의 목적의식론에 입각한 방향전환론과 입장을 같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