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최재서가 주관하는 인문사 기획의 전작 장편소설 총서 첫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현대소설사에서 본격적인 의미의 가족사소설(家族史小說)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제1부만이 단행본으로 간행(人文社, 1939)된 채 그 속편이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미완성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 직후, ‘동맥(動脈)’(新文藝, 1946.7.∼10.)이라는 제목으로 속편의 일부가 발표되기는 하였지만 끝내 작품으로서 완결을 보지 못하였다.
이 소설은 봉건적인 사회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개화기를 배경으로, 성천(成川) 두무골이라는 조그만 마을에 살고 있는 밀양 박씨 박성권(朴性權)의 가족들의 상호관계와 그 시대적 변이 과정을 그려놓고 있다.
전체 16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소설의 내용을 보면, 박성권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할아버지 박씨, 아버지 박순일(朴淳逸), 그리고 네 아들 형준(炯俊)·형선(炯善)·형식(炯植)·형걸(炯杰: 첩 尹氏 소생의 서자), 형준의 아들인 성기(成基)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친 가계의 변화가 함께 드러난다.
작품 속에 그려지는 1대인 할아버지와 2대인 박순일은 모두 갑오년 난리 이전에 살았던 구시대의 인물들이며, 아전으로서 돈을 모은 1대와 그 재산을 주색과 아편으로 탕진하고 객사하는 2대의 이야기는 소설의 제1장에서 모두 완결된다. 3대에 해당되는 박성권은 스무 살의 나이에 아버지 박순일의 죽음과 집안의 파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다가 박성권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상대로 장사도 하고 군수물자를 운반해주기도 하면서 재산을 모으고, 그 돈을 높은 이자로 늘려나감으로써 물질적인 부를 획득하여, 쇠퇴한 박씨 가문을 다시 일으킨다.
박성권은 본처인 최씨(崔氏) 사이에 세 아들을 두게 되었고, 빚 대신으로 얻은 쇠퇴한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딸 탄실을 첩으로 거느리면서 형걸을 얻게 된다.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사회적 변화에 편승하여 오로지 돈을 모으기에 온 정열을 바쳐온 박성권의 ‘포학하고도 아구통 센 성격’은 봉건적인 사회체제의 붕괴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초기 상업주의의 실리적 측면을 전형적으로 표출하고 있으며, 그의 네 아들에게 특이한 방향으로 분화, 계승된다.
맏아들 형준은 그의 아버지 박성권의 절대적인 권위에 억눌려 무기력한 일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업욕과 실리주의적 태도는 아버지를 닮고 있다.
형선의 경우는 온건하고 착실한 보수적 기질을 지님으로써 선량한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되기도 한다. 이들에 비하여 서자인 형걸은 적극적이고 과단성 있는 아버지의 기질을 그대로 받아 시대에 앞서가는 사회적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형준과 형걸은 하녀인 쌍네를 가운데 두고 서로 반목·갈등을 보이고 있다. 이 소설의 제16장은 형걸이 자신의 울분과 격정을 끌어안고 기생 부용을 찾아갔을 때, 그 문전에서 아버지인 박성권을 발견하게 되어 결국 집을 뛰쳐나오게 됨으로써 이 집안에 일어나게 될 커다란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이 이 부분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건 진전을 확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박성권을 중심으로 하는 밀양 박씨 일가의 변화는 주로 상승적인 가족사에 해당되는 것인데, 작가는 이 변화의 과정 속에 대조되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삽입함으로써 상황적 변이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은 같은 밀양 박씨의 문중에서 박성권의 집안과 대칭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박이균(朴利均) 형제의 집안이 누대 토호의 영화를 누리다가 결국은 몰락하여 국수장사에서 대장장이, 그리고 여관업으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과, 파평 윤씨 윤 초시네의 쇠퇴(특히 윤 초시의 딸 탄실은 빚 때문에 박성권의 첩이 되어 형걸을 낳게 된다.)를 그려놓고 있는 점에서 쉽게 확인된다.
말하자면, 시대의 변천에 동화하면서 가족의 번영을 꾀하여 물질적인 부를 누리게 되는 박성권 집안의 상승적 가족사와 함께, 그 반대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또 다른 가계의 몰락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역사의 섭리로서의 가족의 융성과 쇠퇴를 함께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 소설은 비평가이자 이론가이기도 했던 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논리를 직접 작품으로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창작되었다. 1939년 『조광』 6월호(44호)에 발표한 「작품의 제작과정」에서 "연대기를 가족사의 가운데 현현시킨다"라고 말하고 있는 대로 이 작품은 가족의 변화를 통하여 사회질서의 변천 과정을 총체적으로 드러내어줌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역사적·사회적 변동의 실상을 면밀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대적 풍속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주로 청일전쟁 이후의 초기적인 상업자본주의의 성립 과정에 따른 직업의 변화와 신분적인 이동에 집중되고 있다.
그밖에도 신식교육기관의 등장과 취학문제, 기독교의 전파, 일본인들의 상업적 진출과 외래문물의 수용, 의식생활의 변화 등을 폭넓게 묘사하면서, 이러한 시대적 풍속을 가족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짓고 있다.
이같은 당대 풍속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그것을 통해 전형을 획득하고 나아가 인물을 사실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작자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풍속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작품의 구성력을 약화시켰다든지, 사건의 설명적 진술이 많아 등장인물의 성격적인 차이를 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였다는 점 등이 그 단점으로 지적될 수도 있으나, 완결을 보지 못한 작품이라는 점을 일단 고려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