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여천(黎泉)·임목아(林木兒). 경상북도 안동 출생. 이황(李滉)의 13대 손인 이가호(李家鎬)의 4남이며 이육사(李陸史)의 동생이다.
어려서는 조부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대구 교남학교(嶠南學校)를 거쳐, 1935년 일본 도쿄 호세이대학[法政大學] 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고종의 친척 이정원(李貞媛)과 혼인하였고,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하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초대 서기장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조선공산당 기관지로 발간된 『해방일보』와 좌익계 일간지인 『현대일보』 발간에도 관여하였다.
1947년 말에 월북, 북에서 중앙본부선전선동부 부부장직에 있었으며, 6·25 직후 1953년 8월 남로당 숙청 때 임화·설정식(薛貞植) 등과 함께 ‘미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투옥, 1955년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전영사(餞迎辭)」가 입선되고, 1929년 소설 부문에서 「탈가(脫家)」가 선외가작으로 뽑혔지만 시인이나 소설가로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
1932년 『조선중앙일보』에 「신춘당선문예개평」과 1933년 『조선일보』에 「시에 나타난 로맨티시즘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평론 활동을 시작하여 1930년대 우리 비평계를 주도하는 전문적인 비평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1942년에서 광복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집필을 중단하였으며, 광복 후 1945년과 1946년에는 다시 왕성한 평론 활동을 보였다. 월북하기까지 그가 남긴 전체 평문은 100편이 넘는다.
그의 비평이 전개된 과정을 정리해 보면, 첫째 단계가 ‘행동의 문학’이다. 초기 평문에서 문학은 사회 현실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고 비판, 변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르주아문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둘째는 ‘태도의 문학’이다. 이는 문학의 정치적 실천이 용납되지 않고 프로문학이 침체 국면에 접어들자 사회 현실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작가가 가져야 할 태도 내지는 모럴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셋째는 ‘지성론·교양론’ 등으로 문학이 인간의 내면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지성, 강인한 정신, 명석한 기지가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넷째 단계는 1930년대 말에 제기되는 ‘제3의 논리’다.
상실된 비평정신과 비평의 영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장 보편 타당한 당대의 시대의식을 비평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방기에 이르러서는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에 근거한 ‘인민적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내세웠다.
성장 환경에서 형성된 이념 지향성, 서구 문학 전공(불문학, 앙드레 지이드 연구가 졸업 논문이었음.)을 통해 획득한 교양과 균형성, 신문기자 생활에서 체득한 저널리즘적인 감각과 순발력 등은 그의 비평 세계를 구축하는 원동력이었다.
그의 비평은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논리의 전환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리얼리즘 정신의 고양과 문학의 이념성 회복이라는 일관된 방향 위에서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