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3월 18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1985년 10월 13일 사망했다. 본명이 백세철(白世鐵) 필명이 백철(鐵)이며, 창씨개명한 이름이 시라야 데세이데쯔(白矢世鐵), 시라야 데쯔오(白矢鐵雄), 시라야 데쯔(白矢鐵)다.
한학을 공부하다 1921년 3월 평안북도 용천의 입성학교 4학년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1922년 5월 신의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26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1927년 3월 일본의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후 전원파적 동인시지 『지상낙원(地上樂園)』의 동인으로 1년간 활동했다.
1930년 전일본무산자예술동맹(NAPF)에 가입하여 NAPF의 전문지인 『전위시인(前衛詩人)』의 동인이 되었다. 1931년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개벽사(開闢社) 기자가 되면서 국내에서의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31년 10월 1일부터 20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농민문학의 문제」로 본격적인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1932년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8월 전형위원과 집행위원으로 참가했다. 1934년 8월 카프 제2차 검거사건(전주사건, 신건설사사건)에 연루되어 1년 반 동안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5년 12월 석방되었다.
1938년 12월 22일부터 27일까지 『동아일보』에 일종의 전향서인 「비애의 성사(城舍)」를 발표했다. 1939년 3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했고, 10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후 1943년까지 상무간사, 상임간사 등을 역임했다. 1939년 12월 21일 조선문인협회 주최 문예의 밤에서 「전쟁문학에 대하여」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1940년 10월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승진했고, 10월 11일 일본 요코하마(橫浜)에서 일본천황이 참관하는 ‘특별관함식’에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추천 조선특파문인으로 참가했다. 11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로서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회시국강연회 연사로 11월 30일부터 「총력운동가 선전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평안도에서 강연했다.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선전부 촉탁, 참사(參事)도 맡았다. 1941년 2월 7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서 주최한 「문화익찬의 반도체제」 좌담회를 주도했고, 2월 8일 부여신궁어조영(扶餘神宮御造營) 근로봉사 문화인부대일원으로 참가하여 부여에서 근로봉사를 했다. 1941년 2월 경성미술가협회 이사로 위촉되었고, 11월 15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내선작가간담회에 참석했고 12월 13일 결전문화대강연회 사회를 보았다. 1942년 6월 10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일본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에 출석했으며 12월 8일 조선문인협회 연극문화협회와 동양극장이 주최한 '대동아전 1주년기념 국민시낭독회'에서 강연했다. 1943년 4월 『매일신보』 북경지사장으로 전보되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론수필부회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시대적 우연의 수리」(『조선일보』 1938년 12월 2~7일)부터 친일적인 글을 쓰기 시작해서 이후 대동아공영권과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의 징병 혹은 학병을 독려하고, ‘대동아공영권’건설을 위한 문학과 문화의 창조를 역설하는 다수의 글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글로 「시국과 문화문제의 행방」(『동양지광』 1939년 4월), 「동아의 신문화와 ‘협동’에의 의지」(『총동원』 1940년 2월), 「금후엔 문화적 사명이 중대」(『인문평론』 1940년 7월), 「신체제와 저널리즘」(『인문평론』 1940년 11월), 「천황폐하어친열특별관함식배관근기」(『삼천리』 1940년 12월), 「낡음과 새로움」(『국민문학』 1942년 1월), 「제국해군의 위용」( 『매일신보』 1941년 5월 27일), 「결의의 시대」(『국민문학』 1942년 11월)등이 있다.
해방 직후 임화(林和)의 권고로 문화건설중앙협의회 기관지인 『문화전선』의 책임편집을 2호까지 맡았다. 비슷한 무렵 『중앙신문』 편집차장으로도 재임하다가 1946년 1월 사임했다. 1945년 10월 서울여자사범대학교수로 부임했다. 1947년부터 『조선신문학사조사(朝鮮新文學思潮史)』(수선사)를 발간했고, 194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옮겼다. 1949년 『문학개론』(동방문화사)과 『조선신문학사조사 현대편』(백양당)을 발간하는 한편 동국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55년 중앙대학교 문리대학장으로 이임했고 정년 때까지 중앙대학교에서 재직했다. 1957년 『국문학전사』 (신구문화사, 이병기 공저), 1958년 『문학의 개조』(신구문화사)와 『문학 A·B·C』(글벗집)를 발표했다.
1960년 7, 8월 브라질에서 개최된 제 31차 국제펜클럽대회에 정비석과 함께 참가했다. 1961년 문화사절단으로 동남아 각국을 순방했으며 1962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1964년 『한국문학의 이론』(정음사), 『20세기의 문예』(박우사), 1965년 『문명사화』(동서출판사)를 발간했다.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68년 『백철문학전집』(전 4권, 신구문화사)를 발간했다. 1969년 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1971년 1월 제 37차 국제펜클럽 서울대회 대회장과 문화예술진흥위원에 임명되었고, 1972년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작가기금 운영위원장과 중앙대학교 대학원장·사회개발대학원장·문리대학장을 겸임했다. 1975년 『문학자서전-진리와 현실』(박영사)과 『한국신문학발달사』(박영사)를 발간했다. 1976년 한국저작권연구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백철의 일제 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IV-7: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882∼84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1963년 서울시문화상, 197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 1976년 제 17회 3·1문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