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국(翠菊)」의 주인공 ‘분이’는 7남매를 둔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궁핍에 지쳐 아홉 살 된 분이를 내시인 김동지(金同知)의 손자며느리로 팔고 주1로 떠나버린다. 분이는 비슷한 사정으로 내시의 며느리가 된 시어머니와 깊은 정을 나눈다.
‘분이’는 내시의 양자로 들어온 남편과는 부부로서의 애정이 없다. 분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성격이 괴팍하고 장애를 지닌 남편을 미워하게 된다. 그러던 중 분이는 건강한 사내를 알게 되고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지면서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남자가 함께 도망가자고 제의하였을 때 분이는 흔들리지만, 자기를 친딸 이상으로 아껴준 시어머니를 버리고 떠날 수 없다는 인정의 끈에 얽매이게 된다.
‘분이’는 시어머니와 둘만 시골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서울에 있던 남편이 시골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분이는 갈등과 불안 속에 있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다.
「취국」은 내시 집안에 며느리로 팔려 온 여인의 운명이라는 독특한 주2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는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인 가족 제도와 그에 희생이 되는 가난한 집안 출신 소녀의 이야기라는 보편적인 차원의 주제 의식으로 수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희생이 단순히 억압적인 가족 제도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분이와 시어머니의 애정이라는 인간적인 갈등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점에 제재의 특이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는 긴 세월에 걸친 김동지 집안의 내력, 그 집안에 팔려 온 분이의 성장 과정과 감정의 변화, 내시 집안의 며느리들인 분이와 시어머니의 인간적인 애정 등이 기술되고 있어, 그 이야기만으로는 장편소설적인 얼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작가 안수길은 이러한 줄거리를 이틀 동안에 벌어지는 사건과 상황으로 간략하게 압축함으로써, 단편소설적인 플롯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구현해 내고 있다.
「취국」은 인간이 원초적(原初的)으로 지니고 있는 본능과 그 본능을 억제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인정의 갈등 속에서 희생된 한 여인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감정적으로 싫은 남편과의 생활은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었고, 그렇다고 인정을 저버리고 도망갈 수도 없었던 전근대적 여인상을 이 소설에서 제시하고 있다.
작가는 분이로 하여금 도망을 가게 한 것도 아니고, 주3의 미덕을 지키기를 요구하고 있지도 않다. 「취국」은 전통적 인습의 붕괴 과정에서 희생되는 인간의 삶을 조명한 작품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