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소죽(小竹). 경상북도 영주 출신. 목사인 강병주(姜炳周)와 최영주(崔榮周)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이영신(李永信)과 결혼하였다.
대구의 계성중학교를 거쳐 1934년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에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본과를 마치고 1940년에 일본의 동경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8·15광복 후 1953년에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神學校)에서 교회사분야의 신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64년에는 목회와 교육사업의 공로가 인정되어 미국의 스털링대학(Sterling大學)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평양의 서문밖교회와 선천(宣川)의 남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였으며, 신학교를 졸업한 후인 1938년에 선천의 남교회에 목사로 부임한 때부터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 뒤, 1942년에 선천북교회로 옮겼으나 남북분단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1947년에 당시의 피난민교회였던 서울의 영락교회(당시에는 베다니교회)에서 목사 한경직과 함께 동역목사(同役牧師)로 일했다.
심방과 교인들의 교육 그리고 설교를 담당하였으며, 또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성가대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1955년에 영락교회를 사임하고 장로교의 역사적 상징인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25년간 목회를 하였으며, 1980년에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복음적인 신앙의 방향으로 생활하고 실천하면서 목회를 담당하였으며 종교가 윤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입장에 서서, 경건한 믿음과 도덕적인 생활을 내세웠다.
그러나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지적함에 있어서 철저하여야 할 예언자적인 사명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변화되어 이룩되는 온건한 사회변혁을 지향하며 화해와 조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회개와 정화를 통한 교회의 갱신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에큐메니컬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해 개혁교회의 온건한 신앙으로써 사회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였다.
행정적인 능력과 함께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즉, 서울의 동흥중학교 교장, 숭실대학 재단이사, 계명대학 재단이사, 그리고 연세대학교의 재단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숭실대학교의 이사장을 거쳐 1982년에는 그 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사망했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회장으로 세 번 선출되었으며 서울장로회신학교를 설립, 1962년부터 1985년까지 교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마산에 있는 창신학원의 이사도 담당한 일이 있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측)에 속하는 목사로서 한국기독교선교단체협의회의 회장,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의 회장,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측)의 최고직위인 총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사단법인 세계대학봉사회의 이사·이사장 그리고 총재를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산실이었던 입법회의에서 입법의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미국의 일부 여론에 반대하면서 그 대책위원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1970년에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