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교회 ()

목차
관련 정보
개신교
단체
1901년 마산에 세워진 개신교 첫 교회.
이칭
이칭
마산포교회, 성호리교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1901년 마산에 세워진 개신교 첫 교회.
연원 및 변천

1901년 백도명(白道明)의 전도로 김마리아(金瑪利亞), 김인모(金仁慕) 등 여자 7인이 마산에서 모여 정기적으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문창교회의 시작이다. 이후 이들은 미북장로회 부산주재 선교사 로스(Cyril Ross)에게 학습을 받고 1902년 가옥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무렵 김주은(金主恩)이 호주장로회 선교사 손안로(A. Adamson)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그의 아들 이승규(李承奎)를 비롯한 수십인에게 전도활동을 시작했다.이에손안로 선교사가 마산에 가옥을 사들여 예배처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03년 3월 19일 이 두 예배공동체가 통합하여 마산포교회로 발전하였다. 이 교회는 1906년 5월 독서숙을 설치하고, 1909년 8월에는 교회 안에 초등교육 기관인 창신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1911년 7월 상남동에 예배당을 신축하고, 1912년 3월 17일 최경호를 장로로 안수하여 3월 19일 당회를 조직했다. 당시 당회장은 손안로 목사가 서기는 최경호 장로가 맡았다. 1912년 4월 창신학교에 3년 과정의 고등과를 신설하고, 1913년 의신여학교를 신설·분립하였다.

1919년 3월 초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이 교회의 장로이자 창신학교 학감인 이상소와 의신여학교 교사인 임학찬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창신학교 교사인 최용규, 의신여학교 교사인 김필애, 박순천 등이 준비한 3월 21일 마산 장날 독립만세 시위에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 다수가 참여하게 되었다.당시 임학찬, 최용규, 박순천 등이 체포되어 1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1월 박정찬(朴禎燦) 목사가 부임하고, 한석진 목사 재임기에 착공한 80평의 석조 예배당이 완공되어 12월 낙성식과 헌당식을 거행했다. 이 무렵부터 교회 이름도 문창교회로 개칭하였다. 1924년 4월에는 의신유치원을 설립 운영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당시 저항하다 교회에서 세운 창신학교는 1939년 7월 폐교되었다.

해방 이후 1951년 장로회 총회에서 고신파의 분립으로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법통파(고신파) 문창교회”와 백리언 목사를 중심으로 한 “총회파 문창교회”가 양분되어 교회당 소유권을 둘러싼 법정 소송이 전개되었다. 이후 법정 소송이 마무리되고 재산 분할이 이루어져 1970년 9월 고신파 교회는 신축 예배당으로 이전해 제일문창교회로 새로 시작하였다.

현재 문창교회는 국내외 선교, 장애인을 돌보는 쿰선교회 등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마산문창교회 100년사』(문창교회100년사편찬위원회,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마산문창교회 85년사』(김기현, 마산문창교회, 1986)
문창교회(moonchang.or.kr)
집필자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