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송 ()

현대문학
인물
일제강점기 「아름다운 고향」 · 「그리운 거리」 · 「거친 파도의 거리」 등을 연출한 연극인. 평론가 · 아동문학가.
이칭
이칭
말찬(末贊), 신고송(申孤松), 신찬(申贊), 萬代坤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7년 6월 9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경상남도 울주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아름다운 고향」 · 「그리운 거리」 · 「거친 파도의 거리」 등을 연출한 연극인. 평론가 · 아동문학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07년 경상남도 울주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신말찬(申末贊)이다. 다른 이름으로 신고송(申孤松), 신찬(申贊) 등을 썼다. 1916년 4월 언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0년졸업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금융조합에서 급사 생활을 하다가, 1925년 대구사범학교 2년제 특과에 입학, 1928년 졸업했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시절인 1927년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했다. 졸업 직후인 1928년 대구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했으나, 불온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청도 유천학교로 전출되었다가, 1930년 교직을 그만두었다. 그가 작품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4년 잡지 『어린이』 1월호에 「밧브든 일주일간」이라는 일기문을 기고하면서부터이나,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것은 대구사범학교 시절인 1925년 『어린이』 11월호에 동시 「우테통 」이 입선한 이후이다. 1926년 윤석중· 이원수·김순애·서덕출 등과 기쁨사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기쁨』, 『굴렁쇠』 등에 다수의 동시를 발표했다.

교직에서 면직된 이후 이상춘·이갑기 등이 대구에서 조직한 사회주의 성향의 극단인 ‘가두극장’의 연출을 담당했으며, 1931년 일본 도쿄에 건너가 좌경연극단체인 동지사(同志社)와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 조선협의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귀국한 직후 카프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극단 ‘ 메가폰’을 창립했으나, 8월 해산했다. 그리고 카프 산하 극단인 ‘신건설(新建設)’을 이상춘(李相春)·송영(宋影)·권환(權煥)·강호(姜湖) 등과 함께 조직했으나, 일본에서 있었던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 조선협의회 기관지 『우리동무』 배포사건에 관련되어 이찬(李燦)·강호·김태진(金兌鎭)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루고, 1935년 9월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생계를 위해 해방될 때까지 이철(李哲)의 ‘OK그랜드쇼’단과 그 후신인 ‘조선악극단’에서 악극류를 연출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연극을 연출했다. 1943년 12월 제2회 국민연극경연대회의 참가작 「아름다운 고향」을 연출했으며, 1944년에는 「흰독수리」, 「그리운 거리」, 「해당화 피는 섬」, 「성난 아시아」, 「비행기는 이렇게 만들어진다」를 연출했다. 1945년에도 「백마」, 「목련화」, 「거친 파도의 거리」를 연출하는 등 일제의 패망 직전까지 연극을 연출했다.

해방 후, 진보적 문학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김정한과 함께 극단 희망좌를 운영하면서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벌였다.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중앙집행위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연극부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45년 12월 6일 이 두 단체가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자, 1946년 봄 북조선문학예술동맹 결성에 참여하기 위해 박세영(朴世永)·송영·이동규(李東珪) 등과 월북했다. 월북 후에는 1946년 10월 북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 1947년 북조선문학동맹전문분과위원이 되었다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이 되었다. 1951년 6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 겸 연극동맹위원장이 되었고, 10월에는 국립극장 총장이 되었다. 1958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 조소친선협의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1959년 국립연극학교 교장,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196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사망 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프롤레타리아연극운동의 변천과정』(안광희, 역락, 2001)
『한국근대연극사』(유민영,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죽은 동지에게 보내는 조사』(신고송, 예술운동, 1945)
『동아일보』
『매일신보』
『서울신문』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집필자
조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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