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족성(族姓)은 자세하지 않으나 본래 왜인으로, 처음에 박[瓠]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온 까닭에 호공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로 보아 사로국(斯盧國)의 중심지로서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강림지(降臨地)라고 하는 양산(楊山) 기슭에 근거하여, 사로국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수행한 이주민 집단의 지도자였던 것 같다.
서기 전 20년(혁거세 38) 2월 마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불충실한 조공을 꾸짖는 마한왕에게 사로국의 성장을 과시하고 귀국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탈해 이사금이 즉위하기 전에 지략으로써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고 전한다. 이것은 탈해 이사금의 석씨 세력과 호공 세력이 접촉하게 되는 계기로서, 그 뒤 호공의 활동으로 보아 두 세력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알수 있다.
즉, 호공은 58년(탈해이사금 2) 대보(大輔 : 초기의 재상)에 임명되어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담당하였으며, 김알지(金閼智)의 탄생 설화에 관련된 것으로 보아 김씨 세력과 석씨 세력의 매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호공이 박을 차고 왔으며, 박혁거세가 박모양의 큰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박씨라고 칭하였다는 공통점에서 박씨족의 한 분파라고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