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구산파(禪宗九山派) 가운데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승려인 여엄(麗嚴)을 후원하였다. 고려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웠다.
공훤은 지기주제군사상국(知基州諸軍事上國)이었을 때,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소백산에 은거하고 있던 여엄에게 귀의하고, 그를 태조에게 추천함으로써 태조의 부름을 받아 양평의 보리사(菩提寺)에 주석하게 하였다.
927년(태조 10) 9월 견훤이 신라를 습격하여 경애왕이 고려에게 도움을 청하자, 고려이 도와주기로 하여 당시 시중이었던 그는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929년 12월견훤이 고창군(古昌郡 : 지금의 안동)을 포위하자 대상(大相)이던 그는 태조를 따라 이곳을 구원하려고 출정하였다. 이때 홍유(洪儒)와 함께 태조에게 “만약 우리가 싸움이 불리하면 죽령(竹嶺)으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 미리 샛길을 닦아두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아뢰었으나, 유금필(庾黔弼)이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은 그대로 적에게 주는 것이니 급히 진군하여야 한다”고 반대하여 관철되지 못하였다.
935년 4월 나주의 40여 군(郡)이 후백제에 침략되어 신라와 해로(海路)가 통하지 않자, 태조는 이곳을 진무(鎭撫)할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가 여러 공경(公卿)들과 함께 유금필을 천거하여 나주지역을 경략하게 하였다. 936년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할 때 대장군이며, 대상이던 공훤은 기병 3백인과 군사 1만 4700인을 거느리고 출정하여서 신검 등의 항복을 받는 데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