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서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나 유럽 전역을 풍기한 문학운동이다.
자연상태로서의 인간의 ‘선성(善性)과 완전성(完全性)’을 제창하면서 기성의 전통과 문명에 대하여 맹격을 가한 루소(Rousseau,J.J.)를 낭만주의의 시조로 보는 것이 통념화되어 있다.
어떤 하나의 사조가 사상상의 자각적 개념으로서 한 시대를 지배한 시기를 그 사조의 발생과 성립의 기점으로 볼 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자연회귀사상을 바탕으로 한 본능적 욕구를 강조한 ‘감정적 인간’에다 낭만주의의 기원을 두어도 무방할 것이다.
고전주의의 ‘이성적 폭력’ 앞에 질식된 인간의 감정적 욕구와 개성적이며 독창적인, 곧 자연상태로서의 인간의 ‘선성과 완전성’에서 낭만주의의 인간관은 형성된 것이다.
‘낭만적’이란 말은 고대 불어의 ‘로망(roman)’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로망’의 고형(古形)인 ‘로망스(romans)’와 ‘로망(romant)’은 라틴어의 부사 ‘로마니스(romanice)’에서 기원하고 있다.
‘로망(roman)’이란 원래 중세 루스티카 지방의 방언으로 표준어인 라틴어에 대한 각 지방의 향토어(鄕土語)를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라틴어로 쓰인 고급의 문학에 대하여 방언으로 된 각 민족어로 쓴 방언의 문학을 지칭하기도 한다.
‘로망’이 처음에는 ‘기이(奇異)’·‘가공(架空)’·‘경이(驚異)’·‘환상(幻想)’ 등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18세기 말을 전환점으로 하여 비로소 고전주의에 대립된 개념으로 ‘낭만주의(romanticism)’란 특정의 문예사조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로맨틱(romantic)’이나 ‘로맨티시즘(romanticism)’은 그 이입의 초기에는 ‘낭만적(浪漫的)’ 또는 ‘노만적(魯漫的)’과 ‘낭만주의(浪漫主義)’ 또는 ‘노만주의(魯漫主義)’로 각각 번역되고 있었으나, 오늘날은 대부분 ‘낭만적’과 ‘낭만주의’로 사용하고 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서 일어난 낭만주의는 유럽의 전역을 풍미한 문학운동으로 그 시대의 철학사상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는 음악·미술·건축·정치·사회의 전반에 걸쳐서 한때를 풍미한 사조이기도 하다.
따라서 브륀띠에르(Brunetiere,F.)나 허포드(Herford,C.H.) 같은 문학비평가들도 이미 지적하고 있는바, 낭만주의가 함의하고 있는 다양성 때문에, 그 개념을 정확하고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낭만주의의 본질과 개념을 명쾌하게 정의하기 위해 수많은 시인과 비평가들이 시도했으나, 아직도 그에 대한 명쾌한 해명은 없다.
낭만주의의 본질과 개념의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먼저 고대에서 현대까지 모든 문학작품에 나타난 낭만성, 이는 문학의 사실성(reality)과 함께 문학의 기본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사실 어느 시대의 문학이건 낭만성과 사실성은 기본적 속성으로 이를 배제하고 문학을 생각할 수 없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서 유럽의 전역에 펼쳐졌던 문학사조로서의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고전주의 문학사조의 반동으로 일어난 협의의 개념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는 고전주의 문학의 속성과 대비하여 서로의 차이점을 밝힘으로써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고전주의는 계몽주의와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연속적인 개념으로 그 사상의 바탕을 같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몽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고전주의 문학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낭만주의와의 대비는 이 두 가지 사조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가 된다.
고전주의가 세계를 이성으로 파악하고 그 존재 자체의 합리성과 감각적 경험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는 사실은 신뢰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서 낭만주의는 세계를 인식케 하는 힘은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성(感性)이고, 세계 그 자체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감각적 현실을 초월하여 관념의 세계에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낭만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 감각성보다는 관념성을 훨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낭만주의가 어느 특정의 시대와 민족에 결부된 문예사조로서 성립되어 고전주의와 대비된 것은 독일의 낭만주의 비평가 실레겔(Schlegel) 형제에서 비롯된다. 이전에도 시인과 자연과의 조화와 분리를 주장한 실러(Schiller,F.von.)의 ‘소박성의 시와 감상성의 시’로 나누어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을 대비하기도 했다.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형식과 내용의 균형(均衡), 대상의 유형화(類型化) 등이 고전적 예술의 특징이라면, 이에 반대되는 자유분방한 예술적 속성으로서 낭만주의의 특징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고전적인 예술은 한정적인 것을 묘사하고, 낭만적인 예술은 무한을 암시한다”고 한 하이네(Heine,H.)를 위시하여 ≪명상록 Speculations, 1924)≫의 저자 흄(Hulme,T.E.)은 인간을 우물에 비유하여 낭만주의를 ‘가능성이 가득찬 저수지(reservoir)’로 보고 고전주의는 ‘유한적이고 고정된 창조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독일론 De I’Allemagne≫의 저자 스타알 부인(Sta○l,Mme.de)은 ‘고전적인 시’와 ‘낭만적인 시’를 함축적으로 대비하고 있는가 하면, 비어스(Beers,H.A.)는 ≪18세기 낭만주의의 역사≫에서 낭만주의의 대립개념으로서 고전주의 뿐만 아니라, 바로 뒤에 대두된 리얼리즘과도 대비하고 있다.
낭만주의의 자유와 무법칙성, 신기성(新奇性) 등을 고전주의의 법칙성과 전례(典例) 및 관습적(慣習的)인 속성에다, 그리고 낭만주의의 이상(理想)이나 동경(憧憬)과 신비감(神秘感) 등을 리얼리즘의 사실성(事實性)에다 각각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낭만주의가 사조적인 개념으로서 대두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로 한정해서 고전주의가 추구했던 세계관과 서로 다른 차이점을 추출해 본다면 주관적, 개성적, 공상적, 신비적, 동경적, 과거적, 혁명적, 정열적, 전원적, 원초적……등과도 같은 인간의 감정적 속성으로 그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한국에 있어서 낭만주의 문학운동은 ‘백조(白潮)’동인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함은 이제까지의 통념으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폐허(廢墟)’동인과 ‘장미촌(薔薇村)’동인을 거쳐 ‘백조’동인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 낭만주의는 제 나름의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의 이런 한국적 특질이 엄밀한 의미에서 ‘낭만주의’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양한 서구 문학사조의 동시적 유입과 그것도 각 사조의 핵심적 차원이 아닌 표피적인 일국면의 영향을 받고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영성(零星:수효가 적어서 보잘것없음)하기 이를데 없다. 그것이 결국 감읍벽(感泣癖), 곧 비애와 감상(感傷)의 정조와 병적(病的) 관능(官能) 등의 속성을 띠게 된 것이기도 하다.
먼저 한국 낭만주의의 특질을 논의하기에 앞서 서구 낭만주의가 우리 나라에 이입되어 오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에서 ‘로맨티시즘’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07년에 출간된 유승겸 역술의 ≪중등만국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역사교과서(歷史敎科書)에 나타난 용어의 제시일 뿐이지, 그 개념 정의나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아무래도 ‘로맨틱’이나 ‘로맨티시즘’의 일본화된 용어의 본격적인 도입, 곧 개념의 정의나 본질의 설명이 다소라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1920년대 전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김안서(金岸曙:金億)의 <문예사조>를 위시하여 최학송(崔鶴松:崔曙海)·현철(玄哲)·백대진(白大鎭) 등의 서구문학과 사조의 소개와도 같은 극히 제한된 평문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1921년 ≪개벽≫지에 연재된 김안서의 <근대문예>에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를 대비하여 그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이성과 감성, 현실과 꿈, 객관과 주관, 규제와 자율, 고대와 근대 등으로 두 사조의 속성을 차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구의 낭만주의 시인이나 작가 및 작품들의 소개도, 그 이입(移入)의 초기에는 극히 제한적이고 단편적이었다. 작품과 함께 작가의 전기적 국면의 본격적인 소개가 이루어진 낭만주의 시인이나 작가로는 바이론(Byron,G.G.)·위고(Hugo,V.M.)·루소 등이 있을 뿐이다.
바이런은 1910년 10월호 ≪소년≫지에 실린 육당(六堂:崔南善)역의 <해적가 海賊歌 The Corsair)>와 오랑(鰲浪)역의 <대양 The Ocean>을 위시하여 1921년 1월호 ≪신천지≫에 실린 김한규의 <팔대문호약전 八大文豪略傳> 중 ‘문계(文界)의 마왕(魔王)’에서 그의 생애와 문학을 연관지어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위고는 ≪소년≫과 ≪청춘≫ 양지에다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을 육당이 초역(抄譯)한 <에이비시계 ABC契>와 <너 참불상타>를 비롯하여 민우보(閔牛步) 역의 ≪애사 哀史≫ 또는 ≪쟝발잔의 설움≫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리고 위고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전기적 국면의 소개는 김한규의 <팔대문호약전>의 <낭만파 문인 뷕토 유고>에서 본격화된다.
루소는 이광수(李光洙)의 <자녀중심론>이나 <정육론 情育論>에서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는 에밀(Ɛmile)사상을 소개한 것을 위시하여 1920년 11월호 ≪개벽≫에 실린 묘향산인(妙香山人)의 <근대주의의 제1인 루소 선생>에서 그의 생애와 사상이 체계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외의 낭만주의 시인이나 작가로는 하이네(Heine,H.)·괴테(Goethe,J.W.von)·블레이크(Blake,W.) 등이 작품과 함께 단편적인 소개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며, 여타는 이름만 열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서구 낭만주의의 이입과정은 극히 제한적이고 구체화되어 있지도 않다. 그들을 소개하는 전신자들의 취향에 의해 극히 단편적이고 문학의 핵심이나 심도와는 거리감이 있는 이입현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폐허·장미촌·백조동인이 펼친 한국 낭만주의운동이 서구 낭만주의의 영향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반증도 된다.
오히려 그 당시 김안서 역의 ≪오뇌의 무도≫나 기타에 집중적으로 번역 소개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 특히 베를레느(Verlaine,P.)·보들레르(Baudelaire,C.h.)·랭보(Rimbaud,A.)·사맹(Samain,A.)·구르몽(Gourmont, Remy de)·모레아스(Moreas,J.) 등의 영향요소로서 폐허·장미촌·백조·금성(金星)동인들의 작품에 나타난 시어나 이미지, 시적 발상법 등에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의 관련성을 짚어볼 수가 있다.
이는 단적으로 말해서 1920년대 전반기에 그 유입이 집중화된 서구문학 사조의 혼류현상을 반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한국 낭만주의 문학에 나타난 특질을 백철(白鐵)은 감상성의 과잉(過剩)과 환몽적(幻夢的) 요소, 우울(憂鬱)이나 비애(悲哀)의 정조를 들어 ‘병적(病的)인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특히 한국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본격적인 단계로 통념화된 백조파 동인들의 문학적 특색을 “이념에서는 낭만주의요, 기분에서는 퇴폐적(頹廢的)이요, 문학태도에서는 상징주의요, 예술관에서는 유미적(唯美的)”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조연현(趙演鉉)은 백조파 동인들의 작품에 나타난 치기(稚氣)어린 감상과 비애의식이 정조화되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하고, 한국 낭만주의의 다양성을 ‘감상적’·‘퇴폐적’·‘서정적’·‘정신주의적’·‘감각적’·‘관념적’·‘저항적’·‘탐미적’·‘민족적’ 등의 문학적 경향으로 유형화하고 있다.
이들 문학적 경향의 유형화에 대한 타당성 문제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낭만주의의 한국적 양상은 다음의 두 시기로 구분되는데, 말하자면 1921년 황석우(黃錫禹)가 주재하여 출간한 시지 ≪장미촌≫을 기점으로 폐허동인의 활동을 전기로, 백조동인의 활동을 후기로 볼 수 있다.
이들 두 동인지의 출간기간의 차이는 불과 2년이지만, ≪장미촌≫을 중심으로 전후기의 시적 특색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전기의 폐허동인의 시적 경향이 무겁고 어둡고 우울한 정조를 기조로 한데 반하여, 장미촌이나 백조동인의 시적 경향은 가볍고 밝은 정조와 감상성을 기조로 하고 있다.
폐허동인을 중심으로 한 전기 낭만주의의 특색으로, 먼저 김안서·황석우 등이 ≪태서문예신보≫에서 본격화되는 서구시의 번역 소개와 함께 한 시작활동이 습작품들이긴 하지만, 근대 자유시 운동을 선도한 것은 사실이다.
한마디로 폐허동인들의 문하적 경향을 놓고 그 다양성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일괄해서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세기말적 사상에 휩싸여 절망과 퇴폐, 죽음과 허무의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테면 황석우의 <태양의 침몰>은 태양이 잠긴 암흑의 세계를 노래한 것으로 그가 프랑스 상징주의 시론을 근거로 자신의 시학을 확립한 전신자적 역할과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식의 황폐화와 허무에다 새 생명을 티우려는 남궁벽(南宮壁)의 ‘대지의 생명과 비의(秘義)’와 자연친화의 사상, 그리고 강한 민족의식을 타오르는 정열로 승화한 변영로(卞榮魯)의 <논개>, 오상순(吳相淳)의 ‘방랑(放浪)’과 ‘허무혼의 절규’ 등은 모두가 낭만적 발상법이 되고 있다.
백조동인이 결성되기 직전에 간행된 ≪장미촌≫은 그 동인의 구성으로 보아 폐허와 백조동인의 성격과 같이하고 있다. 황석우와 변영로가 폐허동인이었고, 박종화·박영희(朴榮熙)·노자영(盧子泳) 등은 후에 백조동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동인의 구성으로 보아, 장미촌 동인의 시적 경향은 폐허동인과 백조동인의 중간적 특색, 곧 백조파 동인의 비애와 감상적 낭만과 밝은 정조는 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조≫지를 주재했던 홍사용(洪思容)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일련의 초기시에 나타난 허무와 비탄(悲嘆), 동경(憧憬)과 감읍벽(感泣癖), 향토적 정서, 그리고 <나의 침실로> 등 이상화(李相和)의 일련의 초기시에서 보인 데카당스와 병적 관능은 보들레르나 베를레느와 같은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홍사용과 함께 한국 낭만주의 시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색(色)’·‘성(聲)’·‘향(香)’의 감각에 의한 오관(五官)의 작극을 시도한 박영희의 <미소(微笑)의 허화시(虛華市)>에 나타난 환몽(幻夢)과 낭만적 정조와 박종화의 <흑방비곡> 시편들에 나타난 비애와 감상성 등은 거의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결성된 금성동인의 한 사람인 이장희(李章熙)의 ‘고양이’의 시적 발상법도 보들레르의 ‘고양이’ 시편들과 연관되고 있다.
이와 같이 백조파를 중심으로 한 1920년대 초반의 우리 낭만주의 시인들이 프랑스 상징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프랑스 상징파의 시나 시론의 깊이에 이르지 못하고 주관과 감성을 기조로 한 환몽(幻夢)과 비애의 눈물과 감상성을 띠게 된 것은 한국 낭만주의 시의 한계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한국 낭만주의가 서구의 문예사조들이 일시에 유입되어 다양성을 띠게 된 요인으로는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의 경우와도 같이 여러 문학사조들이 순차적(順次的)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1920년대 초의 극히 짧은 기간에 여러 사조들이 집중적으로 유입되어 혼류현상(混流現象)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시대 우리 시인 및 작가들이 서구의 다양한 문학사조를 심도있게 받아들일 만큼의 문학적 소양이나 지적 수준이 못 미쳐 있었고, 사상적 기반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낭만주의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도입된 다른 문학사조들도 그 본질이나 깊이에 접근했다기보다는 표피적인데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