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symbol), 상징주의(symbolism, symbolisme)의 어원은 증표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symbolon이다. '상징'은 부호·기호·암호이며, 배후에 무엇인가를 암시·환기·계시한다.
상징은 매개인 사물과 그 매개가 암시하는 의미의 이중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겉으로 비유와 유사한 구조이나 무한하고 다양한 내적 아날로지(analogie : 유추)를 갖는 점에서 다르다.
기호론적 관점에서는 모든 기호(sign), 특히 언어기호는 1차적 상징이지만, 기존의 기호내용(시니피에)을 배출하고 새로운 기호내용이 충족되면 2차 상징, 3차 상징 등 즉 문학적·예술적 상징이 된다.
인간을 상징적 동물로 보고, 문학·예술·종교 및 문화의 창조를 인간 특유의 상징활동으로 규정하는 신칸트학파(카시러, Cassirer, E.)에 따르면 상징의 범위는 인간의 모든 창조 활동으로 확대되나, 특히 종교와 예술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미적 상징의 문제는 상징과 상징되는 것과의 관계를 감성과 예지(叡智), 현상과 이념과의 관계로 보는 사변적 미학을 비롯하여 감정이입 미학, 심리학적 미학, 현상학파의 미학, 실존철학(야스퍼스, Jaspers, K. T.) 등 철학의 주요 주제로 다루어진다.
“범시대적 사조로서의 상징주의는 특정 시대를 초월한 상징적 표현양식을 가르키나, 특정 시대의 문학사조로서의 상징주의는 19세기 말엽 프랑스에서 리얼리즘(사실주의), 실증철학 및 과학과 결부된 자연주의, 그리고 객관적 조형성을 강조하는 고답파(高踏派)에 대한 심미적·이상주의적 반동사조를 의미한다.
보들레르(Boudelaire, C.)·베를렌(Verlaine, P.)·랭보(Rimbaud, A)·말라르메(Mallarm, S.)·네르발(Nerval, G.)·로트레아몽(Lautreamont) 등을 상징주의 선구자(전기 상징주의 1850∼80)로, 모레아스(Moreas, J.)·레니에(Regnier, H.)·베르아랭·사맹(Samain, A.)·라포르그(Laforgue, J.)·위스망스(Huysmans, J.)·바쥐 등을 상징주의 전성기(제1기 상징주의, 1886∼1900)로 분류한다.
그리고 클로델(Claudel, M.) ·발레리(Valery, P.) 등을 후기 상징주의(제2기 상징주의, 1900∼ )로 분류한다(김봉기, ‘상징주의’, 1986). 또는 베를렌과 베를렌파(鬱派, 奇派로 양분함), 말라르메와 말라르메파(諧調派, 自由詩派), 모레아스와 모레아스파(로만파, 앙데팡당)로 나누기도 한다.
여기에 러시아의 투르게네프와 솔로굽, 영국의 예이츠(Yeats, W.B.)독일의 릴케(Rilke, R. M.)와 게오르게 등을 추가하면 상징주의 운동의 국제적 규모가 드러난다. 시작과 끝을 어디로 설정하건, 또 어떻게 분류하건, 상징주의 운동의 가장 주요한 시인은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로 볼 수 있다.
상징주의가 파리의 카페나 주점에서 문학운동 서클을 형성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최초의 서클은 베를렌·모레아스 등이 모였던 ‘레지드로파트’(파리의 좌안, 1878∼1883), 베를렌과 모레아스를 비롯하여 프랑스 각 지방, 그리스·포르투갈·핀란드·미국 등지에서도 모여든 ‘샤노아르’(黑猫, 20년간 번창. 세느의 우안), 그리고 세력이 좀 약했던 ‘르데카당’(세느의 좌안) 등은 상징파운동의 온상 구실을 한다.
또 상징주의 운동지 ≪라 누벨 리브 고셰≫(La nouvelle Rive gauche, 1882.11.9.), 이어서 베를렌과 모레아스 등이 편집에 힘을 기울인 ≪뤼테스≫(Lut ce), 그리고 ≪르 데카당 Le Decadent≫, ≪라 보그 La Vogue≫(1886) ≪라 플륌 La Plume≫(1889) 등이 간행된다.
하나의 문학운동에 많은 서클과 많은 잡지가 참여했음은 상징주의가 집단적 문학운동의 성격을 띠고 세기말 문학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사상·감정의 직접적 표현, 객관적 묘사, 구체적 영상에 의한 직유적 암시를 거부하는 상징주의의 상징은, 모레아스가 말한 대로 ‘이념에 감각적 의장(衣裝)을 입히는 것’이 그 구조적 핵심이다(‘상징주의 선언’, 피가로, 1886.9.18.). 이때 의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념 표현이 그 기능인 바, 역시 이념에 종속하고, 또 이념은 외부의 아날로지의 화사한 의장을 입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다.
상징은 1차적으로 사물(물상)로 된 매개체이며, 그 매개체가 환기하는 감각 차원에서 추상적 관념이나 개인적 감정에 이르는 운동, 즉 시각·청각·후각 등에 의하여 암시·환기하는 관념이나 감정에 도달하는 운동을 내포한다. 사물(매개)→감각(시각·청각·후각 등)→초월적 관념으로 이행함을 ‘수직의 조응’ 이라고 하고, 사물(매개)→육체적 감각→다른 육체적 감각으로 이행함을 ‘수평의 조응’ 이라고 한다.
상징주의에는 두 개의 측면이 있는 바, 상징의 매개가 도달하는 관념·감정이 인간적 차원으로서의 내면에 머문다면 개인적 상징주의(private symbolism),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초월적·보편적 이데아(idea : 이상세계)를 암시한다면 초월적 상징주의(transcendental symbolism)라고 한다. ‘전통적 상징, 전래의 활력 상징, 문화권 상징, 원형상징’ 등은 상징 일반론의 관점에서의 분류다.
상징주의는 낭만주의의 안티테제(Antithese : 反定立)로 등장한 사실주의와 과학적 리얼리즘(자연주의)에 대한 또 다른 이상주의적·신비주의적·심미주의적 반동 사조다. 여기에 데카당스(decadence : 퇴폐주의)적 경향도 추가할 수 있다.
보들레르는 낭만주의자 포(Poe, E.A.)의 영향을 받았고, 상징파 자체도 기독교적은 아니나 이상세계나, 이상미에 대한 신앙은 플라톤(Platon)적 이데아와 기독교적인 신비적 체험과의 유사성 또는 관련성을 갖는다. 여기에 바그너(Wagner, W.R.)에게서 받은 음악적 영향은 상징시를 음악과 동일시하고, 특히 말라르메는 음악이 시의 궁극적 목적으로 본다.
한국에서 상징주의를 도입한 것은 백대진(白大鎭)에 의하여 시작되지만(‘二十世紀初頭 歐洲文學大家를 追憶함’, 新文學, 1916.5.), 본격적 도입은 그의 <최근 태서문단>(태서문예신보 9호, 1918), 김억(金億)의 <쏘로굽의 인생관>(태서문예신보 7∼14, 1918.11.30.∼1919.1.13.), <프란쯔 시단>(태서문예신보 10∼11호, 1918), <스핑스의 고민>(폐허 창간호, 1920), 그리고<근대문예>(개벽 21호, 1922.3.), 황석우(黃錫禹)의 <일본 시단의 2대 경향>(폐허 창간호, 1920) 등에 의하여 활성화된다.
여기에 최승만(崔承萬)의 <문예에 관한 잡담>(창조 4, 1920), 주요한(朱耀翰)의 <일본근대시초>(창조 1호, 1919.2.), 임노월(林盧月)의 <최근의 문예운동>(개벽 28호, 1922), 박영희(朴英熙)의 <악(惡)의 화(花)를 심은 보들레르>(개벽 48호, 1924) 등을 추가하면, 당시 이미지의 문학사조의 도입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10년도 못되는 기간에 단편적으로 도입·소개된 한국 상징주의는, 첫째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사조로서가 아니라 이것과 동시적 유입현상을 보인다. 문학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수용태세가 미비하고, 역사적 필연성에 대하여 제대로 된 인식이 결여되어 비판적 수용을 하지 못했다.
둘째, 일본의 상징주의 도입을 ≪제국문학≫(帝國文學, 1895.1), ≪활문단≫(活文壇, 1896.1.) 등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우에다 빈(上田敏)을 효시로 본다면(우에다는 1905년에 ≪해조음≫(海潮音, 1905.10.)이라는 상징주의 역시집을 간행함.), 백대진과 김억의 활동은 그보다 약 20년이나 뒤지고, 그것도 일본을 중개로 한 도입·소개에 머문다.
셋째, 상징주의 내용 소개에도 한계가 따르기 마련인 바, 상징파 시인들의 일부(대부분은 누락됨)와, 일본 상징주의의 한정된 내용(상징의 기본 개념과 상징파에 대한 약간의 개인별 소개 등)의 복제 범위에 국한되어 있다.
상징파 시인들의 작품의 번역·소개도 이상의 한계를 공유한다. 김억의 시 <야반 夜半>(학지광 5호, 1915.5.), <밤의 노래>(학지광 5호, 1915.5.) 등은 베를렌의 번역 이전에 영향을 받은 흔적을 보여주지만, 베를렌의 <내 가삼에 나리는 비>(학지광, 1916.9.)·<거리에 나리는 비>(태서문예신보 6, 1918)·<가을의 노래>(태서문예신보 6, 1918) 등이 김억에 의하여, 보들레르의 <만상의 조응>(금성 2, 1924)이 양주동(梁柱東)에 의하여, <교응 交應>, 개벽48호, 1924)이 박영희에 의하여 각각 번역·소개된다.
내면화의 결여를 보이나, 획기적인 업적은 김억의 역시집 ≪오뇌(懊惱)의 무도≫(광익서관, 1921)인 바, 베를레르(6편) 등이 수록되어 있고, 말라르메와 랭보는 들어 있지 않다. ≪태서문예신보≫에 수록된 역시는 약 30여편인데, 절반 이상이 상징파 시다.
한국 상징주의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백조≫(1922)·≪폐허≫(1920)를 중심으로 한 퇴폐적 경향 즉 박종화(朴鍾和)·박영희·황석우·이상화(李相和), 그리고 주요한 등을 상징주의로 보는 견해(金恩典, 姜禹植)와 낭만주의로 보는 견해(趙演鉉, 吳世榮)로 갈라져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김동명(金東鳴)·양주동·변영로(卞榮魯)까지 추가하는 경우(김은전), 김소월(金素月)과 이상을 추가하는 경우(강우식)도 있다. 특히 주요한의 <볼노리>를 교응상징, 황석우의 <벽모(碧毛)의 묘(猫)>를 관념상징,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를 초월상징, 박종화의 <사(死)의 예찬>을 죽음상징, 박영희의 <적(笛)의 비곡(悲曲>을 탐미상징, 김소월의 시를 자연상징, 이상(李箱)의 시를 초월상징 등으로 각각 분석하고 있으나(강우식), 통설로 굳힐 수 있는 설득력보다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한다.
한국의 경우, 일제의 탄압으로 상징세계를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계몽의 연장선상에서의 무비판적 수용, 수용할 역사적 동기와 필연성의 결여, 낭만주의와의 공존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대 사조와의 변증법적 인식이 없는 동시공존현상(사실주의와 과학적 리얼리즘, 고답파에 대한 반동의식 결여), 문학운동으로서의 유파와 집단활동 결여, 특히 기독교적·형이상학적 역사의 체험 결여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제약으로 말미암아 초월적·이상적인 미의 세계, 음악성과 운율의 문제, 세계관과 예술관 등에서 허약성과 취약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앞으로 계속 낭만주의와의 혼동을 증폭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