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는 하천·계곡·호소·도로 및 철도 등을 횡단하는 통로를 떠받치기 위하여 축조하는 구조물이다. 사람이 계곡이나 하천에서 징검돌을 발판으로 건너간 데서 비롯되었다. 다리는 사용 재료, 구조 형식이나 용도에 따라서도 여러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다리는 413년에 완공된 평양주대교이다. 현존 가장 오래된 교량은 750년경 불국사를 중창할 때 조성한 청운교·백운교이다. 최초의 근대 교량은 1900년 서양인 기술자에 의해 가설된 한강철교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특징적인 다리들이 다양하게 가설되기 시작했다.
다리의 발생에 대해서는, 인류 이전에 원숭이들이 자기가 걸어가는 길에 장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계곡에 넘어진 나무와 나무들을 연결하고 있는 덩굴 등을 이용하고, 사람은 계곡이나 작은 하천에 흩어져 있는 징검돌[飛石]을 발판으로 하여 건너간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즉, 이 징검돌이 오늘날의 교각이 되고, 넘어진 나무는 구형(構桁)이 되고, 덩굴은 케이블(cable)이 되어 현수교(懸垂橋)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본격적인 다리로서 아치석교의 원리는 에트러스키인(Etrusci人)이 최초로 이용하였고, 로마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244년경 페르시아인에게 전해졌다.
이것은 또 비단길을 통하여 중국에 전해졌고, 이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다리는 그것이 떠받칠 통로나 시설 또는 건너야 할 것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사용재료에 따라 목교(木橋) · 석교(石橋) · 강교(鋼橋) · 철근콘크리트교 · PC콘크리트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목교나 석교는 고대부터 많이 조성되었으며,강철로 만든 강교는 길고 큰 교량[長大橋梁]에 주로 이용된다. 또, 철근콘크리트교는 내구력이 크고 유지비가 적게 드는 이점이 있다. 사용재료 이외 구조 형식에 따라서도 여러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형(桁)을 수평방향으로 가설한 형교(桁橋)를 비롯하여, 형 대신에 트러스(truss)를 사용한 트러스교, 주형(主桁) 또는 주트러스를 양단에서 단순하게 떠받친 단순교(單純橋), 1개의 주형 또는 주트러스를 3점 이상의 지점에서 떠받치는 연속교(連續橋), 연속교의 지점 이외 적당한 곳에 힌지를 넣어 부정정구조(不靜定構造)를 정정구조로 만든 게르버교(gerber bridge)와 아치교 등이 있으며, 이밖에 타이드아치교(tied arch bridge) · 랭거교(langer bridge) · 로제교(lohse bridge) · 밸런스드아치교(balanced arch bridge) · 라멘교(rahman bridge) · 현수교 등이 있다.
한편, 용도에 따라서는 도로교 · 철도교 · 인도교 · 수로교 · 운하교 · 혼용교 · 군용교 등으로 분류하며, 다리면의 위치에 따라 상로교(上路橋) · 중로교(中路橋) · 하로교(下路橋) · 이층교(二層橋)로 나누기도 한다.
(1)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기록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이고 진보된 기술과 형식을 갖춘 다리는 삼국시대에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다리는 국가 정책으로 축조한 것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일부는 마을 자체의 필요성에 따른 자발적인 것도 있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다리는 413년에 완공된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로서,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당시로서는 상당히 대대적인 공사로 진행된 듯하다.
이 밖에도 기록이나 구전으로 전해 오는 다리로는 지금의 경주 서천교(西川橋) 부근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금교(金橋) 또는 송교(松橋)로 불리는 다리와, 부동남(府東南) · 부서남(府西南)의 교천상(蛟川上)에 각각 있던 춘양교(春陽橋)와 월정교(月淨橋)가 있다.
또한, 당시 동경(東京)이 번성하였음을 보여 주는 육교(陸橋)인 궁남루교(宮南樓橋), 여인금제(女人禁制)의 다리인 연우교(延祐橋)가 있으며, 효불효교(孝不孝橋) · 굴연천교(掘淵川橋) · 신원교(神元橋) · 남정교(南亭橋) · 통한교(通漢橋) 등도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다리들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교아치교는 750년경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를 중창할 때 조성한 청운교(靑雲橋) · 백운교(白雲橋)이다. 이 다리는 현존하는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연화교(蓮華橋) · 칠보교(七寶橋)와 함께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고, 연대 또한 가장 오래된 교량이다.
장방형의 돌기둥 위에 받친 아치는 반원(半圓)을 이루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U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어서, 우리나라의 석교아치나 성문아치(城門 arch)의 시원을 보여 주고 있다.
청운교 · 백운교와 모습이 비슷한 연화교 · 칠보교(국보, 1962년 지정)는 경사가 완만하게 처리되었는데, 특이한 것은 돌계단 위에 연꽃을 새기고 중앙에 바둑판 모양의 무늬를 10개나 이어 놓은 점이다.
연화교의 맨 윗단에는 매우 큰 연꽃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으며, 상하의 계단이 만나는 곳에서 천장이 약간의 곡선으로 되어 있는 완만한 아치교이다. 이 다리는 헌강왕비가 비구니가 되어 오로지 망부(亡夫)가 극락왕생하기만을 부처님께 빌었다는 슬픈 이야기도 전한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교량으로서는 우선 선죽교(善竹橋)를 꼽을 수 있다. 개성 자남산(子男山) 동쪽 기슭의 작은 개울에 놓인 돌다리로서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이다. 이 다리는 고려 말엽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하여 순사(殉死)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이며, 동쪽에 한호(韓濩) 글씨의 비석이 있다.
이 다리는 석교로서, 단순교로는 세계 최초의 것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또, 개풍군 동면과 장단군 진서면의 경계를 이루는 개천에 돌로 놓은 취적교(吹笛橋)는 고려 초엽 나복교(羅伏橋)라 불렸는데, 그 이유는 통일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러 왔을 때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이곳에서 그를 맞아 항복을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전남 함평에 있는 돌다리는 남한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려시대의 다리이다. 영산강의 지류에 놓인 이 다리는 투박한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간결하고 다듬지 않은 돌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노면(路面)을 만들어 올린 평교(平橋)형식의 수수한 다리이다.
이 돌다리는 비교적 근대의 교량 형식에 부합되는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승 고막(古幕)이 1274년(충렬왕 즉위)에 가설하였다고 한다. 문헌에는 고막교(古幕橋)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구전으로는 ‘독다리’라 불리고 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다리가 가설되어 현재 많은 예가 전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다리는 서울의 외곽 하왕십리에서 쉐라톤워커힐 쪽으로 한강의 지류에 놓인, 조선시대의 가장 긴 대교였다는 전곶교(사적, 1967년 지정)이다.
1420년(세종 2) 세종이 상왕(上王) 태종을 위하여 이곳에 다리를 놓을 것을 명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당대의 일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에게 직접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홍수에 시달리고 강폭이 너무 넓어 교기(橋基)만 세운 채 중지하고 말았다.
그 뒤 73년이 지난 1493년(성종 24)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길이 78m, 너비 6m였고, 당시 이름은 제반교(濟盤橋)였다. 살꽂이다리는 거대한 돌기둥을 강에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린 다음, 대청마루를 깔듯 긴 시렁돌을 깔아 통로를 만든 이른바 형교이다.
구성의 면밀함과 균형, 각 부분 석재의 장대 · 소박함은 조선 전기 토목기술의 장중한 멋을 표현하고 있다. 서울 장충단공원 어귀 개천 위의 수표교(水標橋) 또한 대표적인 조선시대의 다리이다.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이곳에 옮겨온 것이다.
수표교는 청계천에 놓였던 7개의 교량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석교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그중 현존하는 유일한 교량이다. 1760년(영조 36) 기술자 20인을 동원하여 대규모로 청계천 준설 작업을 벌였는데, 이때 수표교 앞 개천 복판에 돌기둥을 세워 10척까지 눈금을 긋고 물이 불어나는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 개천 바닥을 수표교의 교각에 표시하여 수심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를 ‘庚辰地平(경진지평)’이라고 하여 지금도 이 네 글자를 찾아볼 수 있다. 수표교는 교량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수위를 재는 과학적인 기능도 지녀 매우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밖에도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에서 명정문에 이르는 길 위에 놓인 옥천교(玉泉橋)를 비롯하여, 남한 유일의 목교인 곡성 능파각목교(凌波閣木橋), 강화홍교(江華虹橋), 송광사 삼청교(三淸橋), 벌교홍교(筏橋虹橋), 수원 화홍교(華虹橋) 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다리로 현재까지도 그 아름다움과 정교함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이 중 송광사 삼청교 위에는 1775년(영조 51) 중수한 우화각(羽化閣)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이러한 예는 국내 유일의 것이다. 또, 1794년(정조 18) 가설된 화홍교는 수문이면서 다리의 구실을 하며 돌과 돌 사이에는 접착제를 사용하여 근대적인 수법을 보여 주고 있다.
(4) 근 대
197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의 근대 교량은 적의 폭격을 받았을 때 피해가 적고 또한 복구가 빠른 교량 형식을 위주로 가설하였으나,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우리의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는 다리를 놓도록 정부에서 적극 권장하였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특징적인 다리들이 가설되기 시작하였다.
국내 최초의 근대 교량은 한강철교(漢江鐵橋)인데 트러스교로서 1900년 서양인 기술자에 의하여 가설되었다. 또한, 한강대교도 트러스교로서 1917년 역시 서양인에 의하여 구교(舊橋) 부분이 가설되었고, 1930년 소교(小橋) 부분이, 1937년 대교(大橋) 부분이 타이드아치교로서 가설되었다. 한강대교는 너비 18.4m, 총연장 840.9m이다.
다리의 상부구조가 움직일 수 있는 가동교(可動橋)로서는 1911년에 가설된 압록강철교가 선개교(旋開橋)로서 가동교의 시초이며, 또한 부산의 영도교(影島橋)가 일엽도개교(一葉跳開橋)로서 1934년에 가설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최초로 우리의 기술로써 다리를 건설하게 되었는데, 그 첫번째가 제2한강교이다.
제2한강교 가설 이후로는 국내의 모든 다리가 우리나라 기술자의 힘으로 가설되었다. 1973년에 가설된 남해대교(南海大橋)는 교량형식은 현수교(懸垂橋)로서 중앙경간이 400m, 측경간이 120m로 총 640m이며, 당시 현수교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최근에 가설된 다리로는 동작대교(銅雀大橋)가 있는데, 랭거 거더(langer girder)형식이다.
특기할 것은 노면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중앙부에는 전철이, 양측에는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교량을 가설하는 추세가 사장교(斜張橋)나 닐슨아치(nielson arch) 등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고강도(高强度)의 재료로써 시공이 가능하게 되었고, 또한 구조해석이론(構造解析理論)과 제작 및 가설 기술이 상당히 발전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장교 형식의 다리를 가설하였는데, 서울의 서강대교(西江大橋), 여수의 돌산교(突山橋), 진도의 진도교(珍島橋)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서강대교는 국내 최초의 PC콘크리트 사장교로서 최대경간이 180m나 되는 장대교이다.
① 궁중교량(宮中橋梁) : 궁중 안에 가설된 교량으로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화려한 조각과 장식을 하였으며, 또한 궁중의 재앙을 쫓기 위하여 석수(石獸)나 귀면(鬼面)을 설치하였다. 교폭(橋幅)이 넓고 노면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중앙부는 국왕의 통로였으며 양측은 신하들의 통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② 사찰교량(寺刹橋梁) : 속세에서 부처님의 세계인 절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는 불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주로 스님들에 의하여 사찰에 가설된 교량이다.
③ 성곽교량(城郭橋梁) : 우리나라의 옛 성곽에는 대부분 아치형의 성문이 있었는데, 간혹 성곽의 주변에 도랑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한 것도 있었다. 이것은 적으로부터의 방호용(防護用) 교량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곽 내 배수(排水)를 목적으로 수문(水門)을 겸한 교량이기도 하였다.
④ 민간인 통행용 교량 : 근대 교량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민간인이 통행할 수 있도록 주로 개천이나 강에 가설하였던 교량이다. 이 교량은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하여 하천 공사 및 도로 공사와 함께 가설되었는데, 강의 수위를 측정하는 데도 이용되었고, 또한 바다와 접하는 지역에서는 수문의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교량 위에서 축제나 답교(踏橋)놀이 등을 행하여 1년의 행운을 빈다는 민속적인 의미를 가진 장소였으며, 연날리기 등의 오락적인 장소이기도 하였다.
⑤ 주교(舟橋) : 예로부터 왜구 등 외세의 침입로가 되지 않도록 한강 위에는 교량을 설치하지 않았다.
한강을 건너기 위하여 일반인들은 나룻배를 이용하면 되었지만, 국왕의 배릉(拜陵), 국장 행렬, 국왕의 유람 등 행차 때는 안전이 문제가 되므로, 강 위에 배를 잇달아 띄워 연결한 배다리를 이용하였다.
조선시대 세종 · 숙종 및 효종 등은 그들의 배릉로로서 배다리를 설치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연산군도 배다리를 설치하여 언제나 5, 6기(騎)의 말이 지날 수 있도록 한 뒤 청계산(淸溪山)에서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특히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한 뒤 자주 능행을 하였는데, 이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배다리의 가설을 전담하는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였다.
당시의 주교당상(舟橋堂上) 정민시(鄭民始)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배다리에 사용한 선박은 80여 척이었고, 이에 동원된 격군(格軍)도 1,000인에 달하였으며, 군제(軍制)의 편성을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