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명정전 ( )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 명정전
건축
유적
문화재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전기 창경궁의 정전으로 지어진 궁궐건물. 전각(殿閣).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창경궁 명정전(昌慶宮 明政殿)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보(1985년 01월 08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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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창경궁 명정전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전기 창경궁의 정전으로 지어진 궁궐 건물이다.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으로 이용되었다. 1484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서 1616년에 다시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합각지붕건물이다. 창경궁 명정전은 다른 궁궐 정전과 달리 단층 건물이다. 왕이 정치를 행하는 곳이 아닌 왕대비가 거주할 이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창경궁 명정전은 조선 시대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7세기 전기 목조 건축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전기 창경궁의 정전으로 지어진 궁궐건물. 전각(殿閣).
개설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 이용하였다. 조선 1484년(성종 15)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합각지붕건물.

역사적 변천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성종 15)에 처음 세웠는데,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세웠다. 이후 인조 때와 순조 때 큰 화재를 겪으면서도 무사히 보존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행각 등이 변형되었다. 1983∼1985년에 걸친 중창 공사 때 주변 행각(行閣)과 문정전(文政殿)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용

창경궁 명정전은 사방이 행각과 월랑(月廊: 행랑)으로 둘러 조정(朝庭)을 마련하고 마당에는 장방형으로 다듬은 판석(板石)을 깐 다음 한복판에 어도(御道)를 만들었다. 어도의 좌우에는 24개의 품계석(品階石)을 배열하여 정전 외부공간에 위계적 질서를 부여하였다.

어도 끝에는 위아래 2층 월대(月臺)를 2.5m 높이로 쌓고 정면과 양 옆면에 각각 다른 모양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정면 계단의 너비는 약 5m이다. 이 월대 위 3.2m 안쪽에 나지막한 기단 1단을 쌓고 윗면만을 고르게 다듬은 다음 그 가운데에 원형 주좌(柱座)를 도드라지게 만든 주춧돌을 배열한 뒤 건물을 세웠다.

정면 5칸(18.03m), 측면 3칸(9.64m)에 뒤로 툇간(退間) 1칸을 내달아 평면을 구성하였는데, 바깥두리기둥은 높이 14척(尺)인 평주(平柱)로 하고 내부에는 앞에서 두 번째 줄에만 고주(高柱)를 세워 대들보를 받게 하였다. 세 번째 기둥을 모두 생략하여 보좌(寶座) 주위를 넓게 마련한 점과 건물 외부 뒤쪽에 퇴를 내달아 복도(複道)를 만든 점이 공간구성이라는 면에서 주목하여야 할 특징이다.

또, 입면구성이라는 점에서는 전체적으로 단아한 맛을 느끼게 하여 주는 간결한 짜임새, 알맞게 치켜올린 추녀의 곡선미, 가지런히 배열된 공포(栱包)의 엮음새 등이 주목되고 꽃살창호의 화려함, 정면과 측면 툇간의 창호 밑에 튀어나오게 쌓은 전돌의 무게감 등이 어우러져 뛰어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구(架構)의 짜임새를 보면 기둥 윗몸에 평방(平枋)과 창방(昌枋) 등 수평 부재를 차례대로 엮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놓은 다음 포작수(包作數)가 안 7포(包), 밖 5포인 다포집을 짜올려 지붕을 받치고 있다. 지붕 위에는 마루를 높게 양성하고 용마루에는 취두(鷲頭), 합각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선인을 각각 배열하여 건물에 위엄을 더하는 한편 형태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내부의 보좌는 3면에 4단의 나무계단을 설치하고 둘레에 연꽃모양의 기둥을 장식한 난간을 둘러 세운 다음 가운데 뒤쪽에 어탑(御榻)을 놓고 그 뒤를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장식하였다. 보좌 위에는 화려한 짜임새의 포를 짜올려 만든 보개(寶蓋)를 얹고 보개 한복판에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을 새긴 나무조각을 붙여 왕의 자리임을 상징하게 하였다.

또, 천장의 짜임새를 보면 한복판에 감입천장(嵌入天障)을 마련하여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을 새긴 조각을 매달아 놓았고, 이 둘레에 꽃무늬를 그린 정방형의 소란반자를 둘렀다. 바깥쪽으로는 한 단 낮게 소란반자를 두른 층단천장(層段天障)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견실하게 짠 공포를 장식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내어 천장의 일부를 구성하게 하였다.

특징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등 궁궐의 정전이 거대한 규모의 중층건물인 데 비하여 창경궁 명정전은 소규모의 단층건물이라는 점이 특징적 이다. 창경궁이 왕이 정치를 행하는 곳으로가 아니라 왕대비(王大妃)가 거주할 이궁(離宮)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건물의 좌향(坐向)이 동쪽인 것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물 안팎에 칠한 단청의 색채는 많이 퇴락하였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의의와 평가

창경궁 명정전은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포의 짜임새가 견실하고 쇠서의 곡선이 힘차고 예리한 점, 첨차(檐遮)에 풀무늬를 새긴 수법이 세련된 점, 주춧돌에서 공포까지의 지지체(支持體)와 그 위에 얹은 지붕의 균형이 잘 조화된 점 등에서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으로 인해 초창(初創) 당시인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 적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 1963년 합각머리 안쪽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의 내용이 일치하여, 광해군 때 재건된 것임이 분명하여졌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정전(正殿) 중 가장 오래되고,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과 함께 단층으로 건축된 정전이며, 명정문과 그 좌우 행각 · 홍화문 · 창덕궁 돈화문 등과 더불어 17세기 전기의 목조 건축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誌)』(고종 연간)
『문화재대관(文化財大觀) 보물편·목조』(문화재청, 2004)
『한국(韓國)의 고궁건축(古宮建築)』(신영훈·장경호, 열화당, 1988)
『한국전통목조건축도집(韓國傳統木造建築圖集)』(한국건축가협회편, 일지사, 1979)
「창경궁의 명정전과 명정문」(장경호, 『월간 건축문화』57,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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