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경회루는 서울 종로구 경복궁에 있는 조선 후기 연회 장소로 이용된 궁궐 누정이다. 1985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이다. 처음 지을 때는 규모가 작았으나 1412년에 큰 규모로 중건하였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팔작지붕의 형태이며 전체 기둥은 48개이다. 이 기둥들에는 자연의 이치와 24절기의 의미가 담겨 있다. 경회루는 물속에 세워졌는데 세 개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육지와 연결하였다. 물속에서의 견고함이나 건축의 사상적인 측면에서 경회루는 중요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초창 당시 규모가 작은 누각이었으나 1412년(태종 12)에 연못을 확장하고 큰 규모로 중건하였고, 1473년(성종 4) · 1474∼1475년 · 1506년(연산군 12)에 수리공사가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려 1867년(고종 4)에 재건하였다.
익공계(翼工系) 양식이며 전후 툇간 11량 구조의 이 건물은 방형의 연못 안에 동쪽으로 치우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삼았으며, 둘레에는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廻欄石]를 두어 돌난간을 만들었고, 난간의 엄지기둥에는 12지상(十二支像)을 조각하였다.
또한, 건물과 육지를 연결하기 위해 세 개의 돌다리를 설치하였는데, 그 중 남쪽에 있는 것은 다른 두 개의 돌다리보다 폭을 넓게 하고 어도(御道)를 두어 왕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의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의 외부 바닥은 잔디로 처리하였고, 건물 하층의 바닥은 방전(方塼)을, 상층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다. 건물 안 바닥은 외진(外陣: 바깥둘레기둥)보다 내진(內陣)을 한 단 높게 하여 배석자의 품계에 따라 그 자리를 달리하게 하였으며 외진 기둥은 네모기둥을, 내진 기둥은 원기둥을 배열하였는데, 하층은 돌기둥으로, 상층은 나무기둥으로 하되 모두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민흘림을 두었다.
태종 때에는 이 석주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여 물가에 선 집의 기둥에 용이 서리고 용상에 앉은 임금이 거기에 임함을 상징하였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방대한 작업과 과다한 경비를 우려하여 현재와 같이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하층 천장, 즉 상층 마루의 밑부분은 마루 귀틀을 숨기기 위해 우물천장[格字天障]을 가설하였고, 동쪽과 서쪽에는 하층에서 상층에 오르내릴 수 있게 계단을 두었다. 상층 마루, 끝, 기둥 밖으로는 계자각(鷄子脚: 난간동자에 조각을 한 것)에 하엽을 놓고 원죽(圓竹: 원형의 돌란대)을 두른 난간이 시설되어 있다.
외진 기둥인 평주(平柱)와 고주(高柱) 사이는 툇간으로 되었고, 그 고주 내부에 다시 여섯 개의 내진 고주를 배열하여 속간[奧間]을 만들었는데, 이들 기둥 사이 칸마다 각각 마루 높이에 차이를 두어 하층에서와 같이 배석자의 품계에 따라 앉게 하였다.
이에 따라 축부(軸部)도 짜임이 달라지게 되어 고주간과 내고주간에는 각기 하방(下枋)을 두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았는데 이 문은 필요할 때 들어올리고 내리게 하였으며, 상부는 문인방(門引枋)을 끼운 뒤에 빗살완자교창을 두었다.
상층 평주 둘레와 창방(昌枋) 아래에는 낙양각을 돌리고 기둥머리의 공포(栱包)는 이익공(二翼工)이며 주간창방(柱間昌枋) 위로는 긴 화반(花盤: 창방과 장여 사이에 놓인 화반)을 놓아 도리 밑에 장여를 받치게 하였다.
외진 기둥인 평주 위에 얹힌 퇴보[退樑]는 고주 윗몸에 짜이고 퇴보 위 구조는 따로 뜬창방을 놓고 중도리를 얹어 서까래 윗몸을 받치게 하였으며, 뜬창방에 얹힌 중도리가 뜬창방과 더불어 각 귀에서 왕지가 짜여지게 되므로 그것을 노출시켜 가구(架構)를 볼 수 있도록 귓보를 생략한 것이 특이하다.
툇간은 연등천장이 되어 가구물이 드러나게 하였으나 고주간과 내고주간은 모두 우물천장을 하고 내고주간에는 당초문처럼 변형된 쌍봉(雙鳳)과 여의주를 중앙에 두어 아름답게 단청하였고 고주간은 그보다 조금 간소하게 처리하였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와 추녀마루, 용마루는 모두 양성(陽城: 회반죽을 바름)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머리모양의 장식)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雜像)을 배열하였다.
지붕 물매곡선을 지나치게 날카롭게 잡고 용마루를 번쩍 높여 위관(偉觀)을 갖추려 하였기 때문에 다른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합각머리가 생겨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 부분의 비중이 굉장하게 보이나 평면이 워낙 넓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세부수법에서는 근정전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장식하려 하여 조선 말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방형의 넓은 연못은 장대석으로 호안을 쌓고 서쪽으로 치우쳐 두 개의 섬인 당주(當洲)를 두어 산을 만들고 나무를 심었으며, 누각 동북쪽 호안에는 석루조(石漏槽: 돌 홈통)를 두어 연못으로 물이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것 역시 고종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1865년 정학순(丁學洵)이라는 사람이 쓴 『경회루36궁지도(慶會樓三十六宮之圖)』란 책을 살펴보면 경회루에 담긴 건축 사상적 의미를 살필 수 있다. 이 책은 경회루가 중건되기 전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경회루의 평면 구성에 자연의 이치(理致)가 담겨져 있음을 풀이하고 있다.
경회루의 평면을 보면 정면이 7칸, 측면이 5칸으로 되었고 전체의 기둥 수는 48개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전체 기둥 수의 절반인 24개의 기둥이 바깥 쪽에 세워지고 나머지 24개의 기둥이 안쪽에 세워져 있다. 바깥쪽의 24개 기둥들은 한 개 한 개의 기둥들이 모두 24절기의 한 절기에 해당된다.
북쪽 중앙 칸의 서쪽 기둥이 동지(冬至)를 의미하는 기둥이고 그 기둥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소한 · 대한 · 입춘 · 우수 · 경칩이 되고 동쪽 측면의 중앙칸 북쪽 기둥은 춘분(春分)이 되며 다시 시계방향으로 청명 · 곡우 · 입하 · 소만 · 망종이 되어 남쪽의 중앙 칸 동쪽 기둥이 하지(夏至)가 된다.
다시 시계방향으로 돌아 소서 · 대서 · 입추 · 처서 · 백로 그리고 서쪽 측면 중앙 칸 남쪽 기둥은 추분(秋分)이 되고 다시 돌아 한로 · 상강 · 입동 · 소설 · 대설 · 동지 쪽에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24개의 기둥들은 각기 24절기로서의 의미가 있고 또한 24방(方)의 의미도 갖고 있다.
건물 안쪽의 기둥들로 구성된 정면 5칸과 측면 3칸은 그 전체의 칸수가 12칸으로 되어 있다. 이 12칸은 1년 12달을 의미하며 동북쪽 모서리칸이 정월(正月)이 되어 시계방향으로 삼재(三才)의 의미, 즉 하늘 · 사람 · 땅(天 · 地 · 人)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단일 평면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무리없이 견고하게 가구한 점과 물속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둔중한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양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연회장소로 부합되도록 호화롭게 잘 치장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