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동남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원래의 이름은 제반교(濟盤橋)였다.
살곶이는 청계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성동구 왕십리,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 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즉 사근동 남쪽에서 성수동으로 건너가는 곳을 말한다. 이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서울 최고(最古)의 다리일 뿐 아니라 세종 대에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朴子靑)과 유연현(柳延顯)의 감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살곶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한경지략(漢京識略)』권2 교량조(橋梁條)에는 공식명칭이 제반교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의하면 “스님이 살곶이 다리를 놓으니 그 탄탄함이 반석(盤石)과 같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라 어명(御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반교가 언제부터 살곶이 다리로 불렸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고장 지명이 살곶이평(箭串坪)이라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동으로는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가는 길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송파(宋坡)에서 광주(廣州)·이천(利川)을 거쳐 충주(忠州)와 죽령을 넘어 영남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변에 이르는 교통상 중요 선상에 놓여있다. 또한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가 76m, 폭이 6m이며 돌난간은 없다. 좌우교대는 장대석 석축이고 중간에 교각석주 21열을 세우고 1열에 기둥 네 개를 배치하였다. 다리의 형태가 종횡(縱橫)으로 곡면을 이루어 조화롭고 면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기둥은 유수(流水)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되어 있다. 교각 위에 하천방향으로 멍에돌을 3개 연이어 걸치고 멍에돌 위에 귀틀돌을 가로 걸쳐 놓은 구조로 되어있다. 특이한 점은 교각 4개 중 가운데 2개의 교각을 15 내지 40㎝ 가량 낮게 만들어 이 다리의 중량이 안으로 쏠리게 하여 다리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는 점이다.
고종 대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 다리의 석재를 이용했기 때문에 다리의 일부가 손상되었다고 하며, 1913년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상판에 콘크리트가 덮여지고, 1920년에는 집중호우에 의해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가 방치된 것을 1971년에 보수·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