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회숙(會叔). 정수곤(鄭壽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광겸(鄭光謙)이고, 아버지는 군수 정창유(鄭昌兪)이며, 어머니는 이산보(李山輔)의 딸이다. 숙부 정창사(鄭昌師)에게 입양되었다.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부터 홍문관수찬·세자시강원필선을 지내면서 세손 정조를 보도(輔導)하여, 정조가 즉위하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호조참의·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규장각직제학·선혜청제조·수어사(守禦使)·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지내다가 1781년(정조 5)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호조 및 이조의 판서를 거쳐 의정부우참찬 겸 선혜청당상에 오르고, 다시 형조 및 공조의 판서와 의정부좌참찬 등을 지내다가 1784년부터 죽을 때까지 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함경도관찰사·장용위대장(壯勇衛大將)·돈녕부판사 등을 차례로 지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洪國榮)과 함께 발탁되어 한세상의 권력이 모두 돌아갔으나 끝까지 분수를 지켜 정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조는 시장(諡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증직과 시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여 벽파(僻派)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가 청정하게 되자 사리사욕을 도모한 죄로 삭탈관직되었다. 뒤에 아들 정성우(鄭性愚)의 상소로 복관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