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

고려시대사
지명
고려시대, 삼경(三京)의 하나로, 경상도 경주의 옛 지명.
이칭
이칭
경주(慶州), 계림부(鷄林府), 동도(東都), 하도(下都), 배읍(陪邑), 거진(巨鎭), 웅번(雄藩), 거부(巨府)
지명/고지명
제정 시기
987년(성종 6)
폐지 시기
1304년(충렬왕 30)
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내용 요약

동경은 고려시대 삼경(三京)의 하나로, 경상도 경주의 옛 지명이다. 935년(태조 18)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경주사(慶州司)라 하였다. 940년(태조 23)에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았다. 987년(성종 6)에 동경이라 개칭하고, 관하에 유수(留守)를 설치하였으며, 금주(金州)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소속시켰다. 1012년(현종 3)에 유수관을 폐지하고 경주방어사로 지위를 낮추었다. 1204년(신종 7)에 경주로 격하시키고 관내 속현을 안동·상주에 예속시켰다. 1304년(충렬왕 30)에 계림부(鷄林府)라 개칭하였다.

정의
고려시대, 삼경(三京)의 하나로, 경상도 경주의 옛 지명.
위치

고려시대 때 동경(東京)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해당한다.

형성 및 변천

고려의 3경(三京)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성종 때 경주에 동경이 설치되면서 수도인 개경(開京, 또는 中京)과 평양에 설치된 서경(西京)을 합해 3경이라 칭한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문종 때에 남경(南京)이 설치되어 4경(四京)이 되었다. 그러나 4경이라는 호칭을 피해 때로는 개경을, 때로는 동경을 제외시켜서 3경이라 칭하였다. 개경을 제외시킨 3경은 지방 행정 구획상의 지칭이고, 동경을 제외시킨 3경은 국왕 순수경(巡狩京)으로서의 지칭이었다.

경주의 연혁

경주는 수관에 직속하는 4속군(屬郡) 10속현(屬縣)과 5영현(領縣)을 관장하는 계수관(界首官)이다. 나머지 5영군현(領郡縣)은 독자적으로 속군 · 속현을 관할하지만 행정적 · 재정적으로 계수관이던 경주의 통제와 지배를 받았다.

동경 경주는 서경 · 남경과 함께 3경의 하나이다. 935년(태조 18)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왕건은 신라를 경주사(慶州司)라 칭하고, 동남해도부서사(東南海都部署司)의 본영으로 삼았다. 940년(태조 23)에 경주의 위상을 올려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았다.

987년(성종 6)에 동경이라 개칭하고 관하에 유수(留守)를 설치하였다. 이 해에 전국에 10도(十道)를 설치하면서 금주(金州)와 함께 영동도(嶺東道)에 소속시켰다.

995년(성종 14)에는 유수사(留守使: 3품 이상), 부유수(副留守: 4품 이상), 판관(判官: 6품 이상),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 7품 이상), 장서기(掌書記: 7품 이상), 법조(法曹: 8품 이상), 의사(醫師: 9품), 문사(文師: 9품) 각 1인씩을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유수관을 폐지하고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지위를 낮추었다.

2년 뒤인 1014년(현종 5)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라 개칭하고, 1030년(현종 21)에는 다시 동경유수(東京留守)라 높여주었다. 이 즈음 예방(銳方)이 바친 『 삼한회토기(三韓會土記)』에 ‘고려삼경(高麗三京)’이라는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동경을 다시 설치한 것이다. 계수관 체제의 동경유수관으로 하고, 숙종 대에 남경을 건설함에 따라 경주라고 격을 낮춰 불렀다.

예종 대에는 유수관의 지위를 회복하고 1116년(예종 11)에 판관(判官)을 고쳐 소윤(少尹)이라 하였다. 예종 연간 동남도부서사는 분도하여 경상도만의 본영이 되었다. 명종 대에 이비(利備) · 패좌(孛佐)의 난 이후 경주사로 강등하였다.

1202년(신종 5)에 동경 야별초(夜別抄)가 난을 일으키자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였고, 1204년(신종 7)에 동경 사람들이 신라를 일으킨다는 구실로 재차 난을 일으키므로 동경을 경주로 격하시키고 그 관내의 속현들을 안동 ·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1219년(고종 6)에 다시 동경유수로 복구하여 성종 대의 위상을 회복하였다.

몽골의 간섭 아래 관제를 격하할 당시 1304년(충렬왕 30)에 계림부(鷄林府)로 개칭되었다. 공민왕 대에 관제를 복구하면서 잠시 경주로 회복하였다. 이후 조선 태종 대부터 경주라는 옛 이름을 다시 사용하였다.

의의 및 평가

고려시대 경주는 동도(東都), 배읍(陪邑), 하도(下都), 거진(巨鎭), 웅번(雄藩), 거부(巨府)로 불렸다. 이규보(李奎報), 김극기(金克己)는 개경, 서경에 대하여 경주를 동도, 배읍, 하도라고 인식하였다. 원간섭기의 이제현(李齊賢), 이곡(李穀), 이달충(李達衷), 하륜(河崙)은 경주의 위상을 낮추어 경상도 거읍 정도의 거진, 웅번, 거부라고 칭한다.

고려 태조는 고려를 건국힌 직후 신라 왕도 시설의 훼철을 시도, 전(前) 왕도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을 높여갔다. 935년(태조 18)에 치읍과 당제의 개차 군현합속을 거치면서 종래의 6기정 관할영역 외 대성군 일부가 추가됨으로써 경주 지역은 늘어났다.

정비된 경주 지역 위에 940년(태조 23) 6부의 명칭이 개정되고 리(里)가 촌(村)으로 편제된 가운데 그 하부에 3~4개 지역촌이 배속되었다. 성종 대에 지역촌 중심의 촌락지배체제를 강화하였지만 경주에 대한 통치는 재지적 기반으로서 읍사 조직과 중앙통제력이 절충된 형태의 과도적 단계였다.

현종 연간 치소성(治所城) 구축을 계기로 경주의 경관은 일반 군현에 맞게 관내의 읍치 구역 읍외 임내로 재편되었다. 각종 관아 시설을 에워싼 치소성 안으로 기존 읍사 시설 외에 외관청을 두었다. 현종 대 경주는 주읍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넓어진 경주의 속읍을 통할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경주는 분소사가 설치된 다경이다(동도역세제자기 분소사). 태조 대에 군현을 합속한 이후 1012년(현종 3)에 치소성 시축, 1018년(현종 9)에 주속현을 재편함으로써 계수관 체제 아래에서 일반 지역처럼 경주의 영역 재편이 시도되었다. 동경관록(東京官祿)이 지급되었는데 동경에서 근무하던 관리에게 녹봉으로 지급하던 외관록(外官祿)이다.

전기에 높은 위상을 가졌던 경주는 12세기 농민항쟁에 실패한 후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관격이 낮아졌다. 관할하던 주 · 부 · 군현 · 향 · 소 · 부곡을 안동 · 경주에 할속하였다. 명종 대에는 경주의 속군현이던 장기현 · 영천현 · 흥해군 · 경산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고 경주에 속하여 있던 이지은소(梨旨銀所)까지 영주에 귀속되었다.

경주의 영역이 줄어든 가운데 남은 경주민이 국가에 납부해야 할 공액 할당량은 증가한다. 1202년(신종 5)에 경주 토호의 반란에 별초군(別抄軍)이 합세하는 방식으로 영주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발하였다. 1308년(충렬왕 34)에 계림부윤(鷄林府尹), 판관, 사록(司錄), 법조를 두었지만, 이후 경주의 중요성은 한층 낮아졌다.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는 경주의 토지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지급받았다. 충선왕 대 왕실 재정 정비를 명분으로 탕목읍의 토지를 덕천고(德泉庫)에 귀속시켰다. 1308년(충렬왕 34)에 다시 계림부라 고쳐 부르다가 1376년(우왕 2)에 안렴사영(按廉使營)의 설치를 두고 금주와 다투었다. 고려 말에 경주는 경상도 내 지역 거점의 위상을 잃고 조선 건국 후 경주부로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논문

한기문, 「고려시대 경주의 경관구성과 위상」(『대구사학』 132, 대구사학회, 2018)
윤경진, 「고려초기 삼한일통의식과 ‘고려삼경’: 동경 연혁의 역사적 함의」(『한국중세사연구』 51, 한국중세사학회, 2017)
정은정, 「고려중기 경주의 읍기 이전과 경관」 (『사학연구』 106, 한국사학회, 2012)
정은정, 「고려전기 경주권역 정비와 읍내 · 외 분리」(『한국사연구』 154, 한국사연구회, 2011)
박용운, 「고려전기 경주의 위상에 대한 고찰」(『경주사학』 16, 동국대학교사학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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