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도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성종 때 시행된 광역 단위의 지방 행정 구역.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995년(성종 14)
공포 시기
995년(성종 14)
시행 시기
고려 초기
폐지 시기
11세기
시행처
고려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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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십도는 고려 성종 때 시행된 광역 단위의 지방 행정 구역이다. 당(唐)의 제도를 차용한 것이지만 명칭은 차이가 있었다. 현종 때 지방 제도 개편으로 기능을 상실했으나 명칭은 한동안 유지되었다. 각 도(道)의 장관은 전운사(轉運使)로 파악되지만, 학자 간에 이견이 있다.

정의
고려 성종 때 시행된 광역 단위의 지방 행정 구역.
제정 목적

995년(성종 14) 고려는 당(唐)의 제도를 도입하여 중앙 정치 제도 및 지방 제도를 개편하였다. 이때 당에서 시행되었던 십도(十道)를 채용하여 광역의 행정 단위를 수립하였다.

당 태종(太宗)이 천하의 지형을 반영하여 정한 십도는 관내(關內) · 하남(河南) · 하동(河東) · 하북(河北) · 산남(山南) · 농우(隴右) · 회남(淮南) · 강남(江南) · 검남(劍南) · 영남(嶺南) 등이다. 이에 대해 고려의 십도는 관내 · 중원(中原) · 하남 · 강남 · 영남(嶺南) · 영동(嶺東) · 산남 · 해양(海陽) · 삭방(朔方) · 패서(浿西)로서 일부 명칭에 차이가 있는데, 이는 실제 고려의 지형을 반영한 결과이다.

내용 및 변천사항

당의 십도는 일시에 제정된 것이 아니고,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쓰던 구분을 중심으로 마련된 것이다. 또한 임시로 설치한 주 · 부(州府)의 수가 많아 전국을 크게 10도로 구분해 통치의 편의를 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고려의 십도는 기본적으로 신라의 구주(九州)를 토대로 일부 영역을 조정한 것이었다. 곧 하남도(河南道)와 웅주(熊州), 강남도(江南道)와 전주(全州), 해양도(海陽道)와 무주(武州), 산남도(山南道)와 강주(康州), 영남도(嶺南道)와 상주(尙州), 영동도(嶺南道)와 양주(良州)는 영역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관내도(關內道)는 한주(漢州)를 기반으로 하였고, 삭방도(朔方道)는 명주(溟州)와 북방 신개척지를 아울렀다. 반면 중원도(中原道)는 삭주(朔州)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기존의 남북 방향에서 동서 방향으로 개편하였고, 이에 따라 영역의 출입이 많았다. 패서도(浿西道)는 서북방 신개척지를 편성한 것이다.

관내도는 양주(楊州) · 광주(廣州) · 황주(黃州) · 해주(海州) 등 29주 82현, 중원도는 충주(忠州) · 청주(淸州) 등 13주 42현, 하남도는 공주(公州) · 운주(運州) 등 11주 34현, 강남도는 전주(全州) · 영주(瀛州: 지금의 정읍) · 순주(淳州: 지금의 순창) · 마주(馬州: 지금의 익산) 등 9주 43현, 영남도는 상주(尙州) 등 12주 48현, 영동도는 경주(慶州) · 금주(金州) 등 9주 35현을 각각 관할하였다.

그리고 산남도는 진주(晋州) 등 10주 37현을, 해양도는 나주(羅州) · 광주(光州) · 정주(靜州: 지금의 영광) · 승주(昇州 지금의 순천) · 패주(貝州: 지금의 보성) · 담주(潭州: 지금의 담양) · 낭주(朗州: 지금의 영암) 등 14주 62현을, 패서도는 14주 4현 · 7진(鎭)을 각각 관할하였다.

이 당시 편성된 주(州)는 당의 제도와 마찬가지로 몇 개의 현으로 구성된 상위 영역이었으며, 대략 1개의 주가 3~4개의 현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비추어 삭방도의 주는 7개가 아니라 17개 정도로 추정되며, 패서도는 이미 주와 현이 따로 설치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편성 원리가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설치된 주의 명칭은 일부만 확인된다. 위에 열거된 사례 외에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에서 잠주(岑州: 지금의 금천), 도주(道州: 지금의 청도), 영주(永州: 지금의 영천). 곡주(谷州: 지금의 곡산) 등이 확인된다. 각 주에는 등급에 따라 도호부사(都護府使) · 절도사(節度使) · 관찰사(觀察使) · 도단련사(都團練使) · 단련사(團練使) · 방어사(防禦使) · 자사(刺史) 등의 외관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모든 주에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1018년(현종 9) 지방 제도 개편으로 계수관(界首官) 중심의 운영 체계가 수립되면서 십도는 기능을 상실하고 관행적으로 지역 명칭으로 사용되다가 오도(五道)가 정착하면서 소멸하였다.

십도의 성격과 장관에 대해서는 학계에 이견이 있다. 우선 도의 장관을 관찰사(觀察使)로 보고 관할 지역을 관찰사가 순찰했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다가 1005년(목종 8) 도단련사 · 단련사 · 자사 등과 함께 관찰사가 없어짐으로써 십도라는 행정 구획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5도호부와 12군절도사만이 남아 이것이 방백(方伯)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당 말기의 관찰사는 절도사와 단련사 사이의 외관으로서 당의 절도사 체제를 채용한 고려에서 관찰사를 십도의 장관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며, 전운사(轉運使)를 십도의 장관으로 보고 전운사가 없어지는 1029년(현종 20)까지 십도제가 존속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또한 절도사가 장관으로서 도를 전제(專制)하고 출척(黜陟)을 집행하였고, 절도사가 폐지되는 1012년(현종 3)에 10도 역시 모두 혁파되었으며, 대신 5도호 · 75도안무사의 과도기를 거쳐 결국 안찰사 제도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울러 십도가 전국적인 지리적 구획이며, 장관인 전운사가 행정적으로 조부(租賦)를 운반하고 백성의 소송을 처리했지만, 십도는 중앙 정부와 주현 사이의 행정 구획이 아니라 단지 조부를 운송하는 방면을 표시하고 지방을 순찰하기 위한 구획일 뿐,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외관들이었다고 하였다.

의의 및 평가

십도는 고려가 처음으로 시행한 도제(道制)로서 형식상 중국의 것을 차용한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신라의 구주(九州)를 계승한 것으로서 이후 오도(五道)와 양계(兩界)의 체계로 이행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 점에서 십도는 고려의 광역 단위의 행정 체계가 확립되어 나가는 과도기적 제도로서 그 의미를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논문

김윤곤, 『고려군현제도의 연구』(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3)
변태섭, 「고려전기의 외관제」(『한국사연구』 2, 한국사연구회, 1968; 『고려정치제도사연구』, 일조각, 1971)
윤경진, 「고려초기 10도제의 시행과 운영체계」(『진단학보』 101, 진단학회, 2006)
이기백, 「고려지방제도의 정비와 주현군의 성립」(『조명기박사화갑기념불교사학논총』, 1965; 『고려병제사연구』, 일조각, 1968)
하현강, 「고려지방제도의 일연구(상)」(『사학연구』 13, 사학연구회, 1962; 『한국중세사연구』, 일조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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