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이비·패좌의 난은 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이비·패좌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반란이다. 이 난은 경주 관내 농민이 신라부흥 운동을 표방하며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충헌의 강력한 진압책에 대항하고자 일어났다. 이비(利備)는 경주토호로 신라부흥의지가 있었던 사람이고, 패좌(?佐)는 최충헌정권의 수탈체제에 저항한 농민군 지도자였다. 이들은 3군을 편성해 스스로 나라를 바로잡는 군대인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칭하면서 관군에 대항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난은 일관된 계획하에 조직적으로 편성되어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정치적 반란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정의
1202년(신종 5) 경주에서 이비(利備)·패좌(孛佐)가 주동이 되어 일어난 반란.
역사적 배경
신라부흥에 참여한 경주 토호(土豪)들의 항복의사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은 그들의 난에 고려왕조를 부인하는 정치적 색채가 있다 하여 강경한 토벌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김척후(金陟侯)를 초토처리병마중도사(招討處理兵馬中道使), 최광의(崔匡義)를 좌도사(左道使), 강순의(康純義)를 우도사(右道使)로 삼아 3군으로써 반란민을 치게 하였다. 경주를 철저하게 진압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함부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최충헌의 의도가 드러나게 되면서 경주민들은 이제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경주 권역 농민군을 이끌고 강렬히 대항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이비와 패좌였다.
경과 / 결과
이들은 운문(雲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 · 울진(蔚珍) · 초전(草田: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에서 무리를 모아 3군(三軍)을 편성, 스스로를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칭하고 각 주 · 군(州郡)을 위협하면서 줄기차게 대항하였다. 이듬해 기양현(基陽縣: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최광의 휘하 관군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이비는 김척후 대신 파견된 병마사 정언진(丁彦眞)에게 사로잡힘으로써 경주의 반란세력은 크게 꺾였다. 이후 패좌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운문산으로 도망을 가서 운문산적(雲門山賊)의 괴수가 되었다. 이에 정언진이 대정 함연수(咸延壽) · 강숙청(康淑淸)을 보내어 “집에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라”고 달랬으나 패좌는 이에 응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죽임을 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한편 최충헌은 난의 무대였던 경상도를 재편해 경주의 관할구역을 축소시켜 안동 · 상주 등지로 이속시키고, 동경을 경주로 격하시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근래에는 이비 · 패좌의 난이 신라부흥을 표방한 것이 아니라 최충헌정권이 경주민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신라부흥을 운운했다고 하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어 이 난의 성격과 의의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무신정권기 농민, 천민 항쟁 연구』(이정신,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91)
- 「농민·천민의 봉기」(이정신, 『한국사』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 「고려무신정권하에서의 경주민의 동태와 신라부흥운동」(김호동, 『민족문화논총』 2·3합집, 1982)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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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어느 한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양반을 떠세할 만큼 세력이 있는 사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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