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2년(신종 5)에 경주에서 패좌(孛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군으로서 초토처치병마좌도사(招討處置兵馬左道使)가 되어 중도사(中道使) 김척후(金陟侯), 우도사(右道使) 강순의(康純義)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쳤다. 그러나 김척후가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하자 1203년(신종 6) 중도사가 정언진(丁彦眞)으로 교체되었다.
1203년 정월 경주의 반란군들이 기양현(基陽縣)으로 들어가자 병사를 이끌고 급습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최충헌이 왕에게 아뢰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조서(詔書)와 약(藥)을 내리고 격려하였으며, 기양현을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시켰다.
또, 태백산적(太白山賊)의 괴수 아지(阿之)를 잡아 서울에 보내어 옥중에서 죽게 하였으며,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의 부석사(浮石寺)와 부인사(符仁寺)·송생현(松生縣: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의 쌍암사(雙巖寺) 등의 승려가 반란을 꾀한다고 보고, 이들을 국문하여 섬에 귀양보내게 하였다.
강순의·이이(李頤)·이유성(李維城) 등과 함께 경주의 반란을 평정시키는 데 공이 가장 많다는 최충헌의 천거로 승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