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80∼112. 성은 박씨. 유리이사금의 둘째 아들로 태자 일성(逸聖)보다 인물이 뛰어나 즉위하였다고도 하고,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또는 史肖夫人)이다.
비계(妃系)가 김씨 한기부(漢岐部)의 유력자임은 파사이사금이 유찬(楡飡)의 못으로 사냥을 갔을 때 이찬 허루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이어 허루는 주다(酒多 : 나중의 角干)가 되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직계라면 탈해이사금 이후 왕위를 계승한 것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가 내로의 아들일 경우 월성(月城)에 기반을 둔 석씨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즉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87년(파사이사금 8)에 가소성(加召城)·마두성(馬頭城)을 쌓았다. 이것은 경주를 벗어난 맨처음의 축성기록이다. 94년에 가야 군사가 마두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1,000여 명의 기병을 사용하여 이미 기마전투의 양상을 볼 수 있다.
101년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다. 102년에는 음즙벌국(音汁伐國: 지금의 경상북도 安康, 안강 南 또는 울진)과 실직곡국(悉直谷國: 지금의 강원도 三陟) 사이의 영토분쟁을 가야의 수로왕에게 부탁해 해결한 뒤에, 다시 음즙벌국을 쳐서 병합하였다. 그러자 실직국과 압독국(押督國: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도 항복해왔다고 한다.
108년에는 다벌국(多伐國: 지금의 大丘 또는 경상북도 義昌)과 초팔국(草八國: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草溪 또는 杞溪)을 합병하였다. 이러한 파사이사금의 치적에 근거해 이 왕대(王代)를 고대국가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재위 33년에 승하하자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