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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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학궤범 / 정읍사
악학궤범 / 정읍사
고전시가
작품
백제시대 때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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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백제시대 때 지어진 작자 미상의 가요.
내용

이 노래의 가사는 『악학궤범』 권5 시용향악정재조(時用鄕樂呈才條)에 「동동」·「처용가」·「정과정」 등 고려가요와 함께 실려 전하고, 『고려사』 악지 2 삼국속악조에도 「정읍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백제시대부터 구전해 온 민간전승의 가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사 본문 중 ‘全져재’의 ‘全(전)’자를 전주(全州)의 지명으로 보고, 백제시대의 완산주(完山州)를 신라 경덕왕 15년에 전주로 개명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동국여지승람 권32 전주부), 경덕왕 때 이후 내지는 고려시대 옛 백제지방의 민요로 보기도 한다.

또 한편에서는 『고려사』 권71 악지(樂志) 2 삼국속악조(三國俗樂條)의 「정읍사」는 『고려사』 편찬자들의 잘못으로 돌리고, 같은 책의 고려속악조에 무고정재(舞鼓呈才) 때 「정읍사」를 가창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무고」와 동일시하고, 「무고」를 만든 사람인 이곤(李混)의 생존 연대와 관련하여 「정읍사」를 고려 충렬왕 때 전후에 개성 주변에서 작사, 작곡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악지와 『고려사』의 악지가 다 같이 재래속악에 대한 편차 방식이 같은 점으로 보더라도, 삼국속악조에 백제속악으로 기록된 「정읍사」는 고려속악과 구별하여 기록한 것으로 편찬자의 잘못이 아니라 백제속악으로 인정함이 옳을 것이다. 또 고려속악조에 들어 있다 하여 모두가 고려시대의 가요로 볼 수는 없듯이, 무고정재 때 「정읍사」를 불렀다 하여 「정읍사」의 제작연대가 무고를 지은 이곤의 생존 연대와 같을 수는 없고, 이는 재래속악, 곧 유전악(遺傳樂)인 「정읍사」를 고려속악정재 때 이곤이 지은 무고라는 악곡에 얹어 불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읍사」는 삼국속악의 하나로 전승되어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무고의 무의(舞儀) 때 가창되었고, 특히 조선시대에 와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에서 악귀를 쫓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인 나례(儺禮) 후에 거행된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처용가」 등과 함께 연주되었다(악학궤범 권5).

이와 같이, 『악학궤범』에 채록되어 악장(樂章)의 하나로 정착하게 되었으나, 중종 때에 이르러 음란한 노래라 하여 궁중에서는 폐지되고 새로 만든 악장인 「오관산(五冠山)」으로 대용하였다(중종실록 13년 4월조).

『악학궤범』에 수록된 노래의 원문과 현대어 풀이는 다음과 같다.

① 원문

(前腔)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어긔야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

(後腔) 全져재 녀러신고요/어긔야 즌ᄃᆡ를 드ᄃᆡ욜셰라/어긔야 어강됴리

(過篇) 어느이다 노코시라

(金善調) 어긔야 내 가논ᄃᆡ 점그ᄅᆞᆯ셰라/어긔야 어강됴리

(小葉) 아으 다롱디리

② 현대어 풀이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어기야차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시장에 가 계신가요/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어기야차 어강됴리/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박병채 역)

음악 형식은 전강(前腔)·후강(後腔)·과편(過篇)·금선조(金善調)·소엽(小葉)으로 되어 있으며, 시의 형식은 11행이고, 후렴을 뺀 기본 시행(詩行)만으로 본다면 3연 6구의 형식이 되고, 또 각 연의 음절수가 3음 또는 4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여 시조의 3장 6구 형식의 근원을 「정읍사」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이 많다.

각 연의 후렴을 보면 제1·3연에 해당하는 전강과 과편에는 각각 2구씩 되어 있으나, 제2연에 해당하는 후강에는 ‘어긔야 어강됴리’ 1구뿐이고, 음악적인 악조(樂調)인 소엽(小葉)에 해당하는 ‘아으 다롱디리’가 없다.

그리하여 후강이라는 악조명 다음에 ‘전(全)’자를 붙여 후강에는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없는 것이 온전하다는 뜻으로 후강전(後腔全)이라 표시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아직은 어느 문헌에도 ‘후강전’ 이라는 악조명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후강에 소엽 ‘아으 다롱디리’가 있어야만 완전한 것이 된다.

특히, 시가 형태면에서 보더라도 「정읍사」가 백제가요로 인정되기는 하나, 오랜 세월 고려속요와 함께 불려오는 동안 다분히 고려적인 성격으로 변모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바, 후렴을 지니는 모든 고려속요가 예외 없이 각 연마다 꼭같은 후렴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후렴이란 언제나 꼭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므로 고려속악과 함께 가창된 「정읍사」도 각 연마다 동일한 후렴을 지녀야만 형태상으로도 온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후강에서 소엽 ‘아으 다롱디리’는 구전되는 동안 탈락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전’자의 처리는 자동적으로 가사본문인 ‘져재’ 앞에 놓여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용은 먼저 제1연에서 행상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무사안녕을 달에게 기원하는 간절한 발원으로부터 시작된다. 곧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는지 몰라 초조하고 안타까운 불안한 심정을 달에 의탁하여 노래하되, 단순한 서정의 표출이 아니라 광명한 달에게 남편의 안녕까지 도모해 주기를 바라는 고대인의 소박한 발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제2연에서는, 현실적으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행방도 소식도 몰라 애태우며, 불안과 의념(疑念: 의심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히려는 자신의 마음을 붙들고자 ‘(혹시 지금쯤) 전주 저자에나 가 계시는지요’라는 가정(假定)의 의문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희구하는 가냘픈 여심(女心)의 발로로써 시작된다.

이와 같이 자위적(自慰的)인 마음의 안정을 애써 도모해 보기도 하나, 남편에 대한 불안과 초조는 더욱 걷잡을 수 없어 이윽고는 ‘어긔야 즌ᄃᆡᄅᆞᆯ 드ᄃᆡ욜셰라’ 하고 마음 속 깊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을 실토하고 만다.

제2연의 어절 풀이에서 첫 음절을 ‘져재’ 또는 ‘全져재’로 보는 두 갈래의 학설이 양립되어 있으나, ‘후강전(後腔全)’까지를 악조명으로 보고, 가사 본문을 ‘져재’로만 보기에는 음악적인 또는 시가 형태[歌句]적인 면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고, 또한 ‘全져재’로 보는 쪽에서도 종전에는 그 뜻을 ‘전주저자에’로만 해석하였으나 ‘온 저자에’라고 보는 새로운 이설도 있다.

‘녀러신고요’의 해석은 그 본래의 뜻 또는 원형을 ‘녀러이신고요’로 풀이함이 일반적이나, ‘다녀신고요’ 즉 ‘다니시는가요’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또 한편에서는 ‘녀더신고요’의 변형으로 보아 ‘녀더시던고요→녀시던고요→가시던가요’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즌ᄃᆡ’는 ‘진데’·‘진곳’ 즉 ‘수렁물(진탕물)이 고인 곳’으로 해석되나, 이 말의 상징적인 뜻은 주색(酒色) 또는 화류항(花柳巷)을 비유한 것으로 풀이된다. ‘드ᄃᆡ욜셰라’는 ‘디디올세라’ 곧 ‘디디면 어쩔까나’ 하는 근심걱정이 쌓인 의구형으로 이루어져서, 표면상으로는 진데 곧 더러운 수렁물을 디디면 어쩌나 하는 표현이지만, 사실은 ‘(수렁물과 같은) 주색에 빠지면 어쩌나(빠질까 두렵소이다그려)’ 하는 속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 악지에 “그 지아비가 밤에 다니다가 해를 범할까(저지를까) 두려워하여(恐其夫夜行犯害) 수렁물의 더러움에 기탁하여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 바와 같이 어디까지나 직설적이 아닌 비유로써 지어진 노래이며, 또 ‘수렁물의 더러움에 기탁하여’라는 말이 바로 이 ‘즌ᄃᆡᄅᆞᆯ 드ᄃᆡ욜셰라’ 또는 ‘내가논ᄃᆡ 졈그ᄅᆞᆯ셰라’를 지적한 말인 듯하다.

‘그 지아비가 밤에 다니다가 해를 범할까 두려워하여’라는 기록을 종전에는 ‘밤길을 다니다가 도둑의 침해나 입지 않을까 두려워하여’라고 풀이하여 피동적인 사실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마땅히 남편의 능동적인 행위로 보아야만 『고려사』의 기록과 가사의 내용이 일치하게 된다.

한편, 전체를 종교적 서원 형식의 노래로 보고, 제2연도 남편에게 반문하는 동시에 대상인 달을 향하여 기원하는 것으로 보아 ‘즌곳을 디디지 말아지라’, ‘행여나 디딜셰라’의 남편에 대한 의구는, 달에게 ‘제발 즌곳일란 디디지 않게 하여 주소서’ 하는 처절한 호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즌ᄃᆡ’를 인체 내의 국부를 상징하는 은어로 보고, ‘드ᄃᆡ다’는 육축(六畜)의 교미(交尾)를 뜻하는 ‘드딘다’라는 방언과 상관시켜 해석하고자 하는 견해도 있다.

제3연(結聯)에서는 남편의 신변에 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의구심이 절정에 이르고 보니, 행상을 해서 버는 돈도 재물도 아랑곳없이 한시바삐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어느 것이나(무엇이나) 다 놓아두고 한시바삐 집으로(나에게로) 돌아와 주소서’ 하고 절박한 하소연을 부르짖고는, 제2연구에서 다시 한숨을 돌이켜 ‘어긔야(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내 사랑하는 당신의 마음 어두워질까(변할까) 두렵소이다그려(변하면 어쩔까나)’ 하는 걱정과 자탄과 애원의 말로써 끝을 맺고 있다.

결연은 가장 이설이 많은 대목으로, 먼저 ‘어느이다’를 ‘어늬다’로 보고 ‘어느 곳에다가’ 또는 ‘어디에나(어느 곳에나)’로 해석하는가 하면, ‘어이다’ 또는 ‘어찌다(자칫하면의 뜻)’로 보기도 하고, 또 ‘어느 누구에다’ 혹은 ‘어느 것에다’로 해석하기도 하나, ‘어느 것이나 다(무엇이나 다)’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다’로 보는 중에서도 ‘어느 것’을 행상인의 짐이나 재물이 아닌 ‘남편의 불안스러운 일’인 동시에 아내인 작자 자신을 휘감고 있는 ‘어느 것’, 곧 불안·의구·고뇌 등으로 보는 이설도 있다.

‘노코시라’의 해석도 ‘(마음을)놓으시리라’ 또는 ‘놓고 계신가요’로 보기도 하고, ‘놓으시라, 놓으십시오’ 또는 ‘놓고 계셔지라(놓고 계셨으면 좋겠다, 놓고 계십시오)’, 심지어는 ‘놀고 계신가요’로 보는 견해도 있는가 하면, 또 ‘놓고시라→노호시라→놓오시라→놓오지라→놓아지라→놓여지라’의 소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처절한 아내의 비원(悲願)이라고 생각한다면 ‘놓고 오시라’로 보는 것이 가장 순리적이다.

‘내가논ᄃᆡ’는 ‘내가 가는 곳(가는 길)’, ‘나의 가는 길’ 등으로 해석하면서도 「정읍사」전편의 문맥으로 보아 ‘남편의 오는 길’이어야 할 것이 ‘내가 가는 길’로 된 점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부부 일심동체설까지 나오게 되었으나, 이 점을 해결하고자 한 풀이가 ‘내이 곧, 내사람 가는 길’로 보는 견해이며, ‘내가 놀던 곳’이라는 아주 색다른 해석도 있다.

그러나 ‘내가논ᄃᆡ’는 어디까지나 ‘내가 가는 곳(또는, 나의 가는 곳)’이어야 하나, 그것이 오가는 길이 아닌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본다면 ‘내사랑 가는 곳’, 즉 ‘사랑하는 님, 남편의 마음’으로 풀이된다.

‘졈그ᄅᆞᆯ셰라’는 ‘저물을세라(저믈세라)’ 또는 ‘저물게 할세라’, 곧 ‘저물게 될세라’, 그리고 ‘잠그랄세라(잠길세라)’, ‘빠질세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졈글셰라’와는 달리 ‘졈그ᄅᆞᆯ셰라’는 ‘저물게 할세라’, 곧 사실상 ‘저물게 될세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저물게 되는 것이 ‘날[日]’이라고 할 때는 제1연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와 서로 어긋나며, 또 저물게 되는 것이 ‘달[月]’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은 ‘날이 저물다’는 말은 있어도 ‘달이 저물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물게(곧 어둡게) 되는 것은 ‘나의 님’, 곧 ‘남편의 마음’이라고 보아야만 모든 어려움이 없어진다.

또한, ‘내가논ᄃᆡ’를 ‘내가 살아가는 곳, 즉 인생의 전도(前途)’로 보고 ‘졈그ᄅᆞᆯ셰라’는 ‘저무는 일이(心想 또는 생활에 어둔이) 없게 하여 주소서’와 같이 이것 또한 종교적 서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제2연의 ‘즌ᄃᆡ랄 드ᄃᆡ욜셰라’와 함께 어법상의 의구형(ㄹ셔+라)은 의구형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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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노래 읽기-정읍사-」(장지영,『한글』11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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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종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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