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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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비저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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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앞을 여며 입는 형태로 된 한복의 윗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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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양팔과 몸통을 감싸며 앞을 여며 입는 형태로 된 한복의 윗옷.
내용

가장 기본적인 복식이다. 언제부터 저고리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에 처음 보이기는 1420년(세종 2) 원경왕후 천전의(遷奠儀)에 나오는 ‘赤古里’ 또는 ‘短赤古里’라는 기록인데, 이는 우리말을 취음한 한자표기인지, 몽고의 영향인지 그 어원을 단정할 수 없다.

고려 이전에 윗옷을 이르는 말로는 신라의 ‘위해(尉解)’가 있다. 위해는 신라말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현재에도 ‘우티’·‘우치’ 등의 방언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저고리와 같은 뜻으로 ‘곁막음[脥隔音]’ 또는 ‘곁막이[絹莫伊]’가 있고, 궁중용어로는 ‘동의대(胴衣襨)’라는 말도 쓰였다.

저고리의 구성은 길·소매·깃·동정·고름이 기본형제(基本形制)이며, 여자저고리는 경우에 따라 끝동이 달리기도 한다. 저고리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하여 왔다.

저고리는 감·재봉법·모양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홑[單]·겹·솜·누비저고리는 감·재봉법에 따른 명칭이고, 여자저고리 중 ‘당코저고리’는 깃의 모양에 따른 것이다.

삼회장·반회장·민저고리는 저고리 각 부분에 별색의 감을 쓴 데 따른 명칭이다. 이 중 가장 격식이 높고 화려한 것이 삼회장저고리이다. 삼회장은 깃·끝동·겨드랑이에 길과는 다른 색의 감을 댄 것으로, 단(緞)·견(絹)·주(紬)·사(紗) 등의 고급직물로 색은 자주나 빨강을 즐겨 썼다.

궁중이나 양반층에서는 직금(織金)이나 금박을 사용하여 한층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였다. 이러한 저고리는 풍만한 치마와 어울려 독특한 곡선미와 색채조화를 자아낸다. 그러나 남자저고리는 계급에 따른 차별이나 장식 등의 변화가 따로 없이 도포나 두루마기의 속에 입어왔다.

우리 민족의 고유복식은 바지저고리를 기본구조로 하는 북방계통이다. 특히 저고리에서는 북방계 옷의 공통된 특징인 곧은깃(直領), 왼쪽으로 여밈(左袵), 좁은소매(窄袖) 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상고시대 저고리의 실상은 4∼6세기 무렵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

벽화의 저고리는 길이가 허리 아래에 이를 정도로 길며, 허리에 띠를 두르고, 좁은 소맷부리와 도련·깃·섶에 별포(別布)의 선(襈)을 두른 특징적인 모습이다. 또한 길이만 좀더 길어지면 포(袍)가 될 수도 있어, 저고리와 포의 엄격한 구별이 없었던 것 또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삼국이 공통된 것이었다.

그 뒤 중국의 영향을 받아 너른 소매, 오른쪽으로 여밈[右袵]이 혼용되는 혼란의 시기를 거쳐 섶의 처리가 우임으로 통일되었다. 고구려의 벽화를 제외하고 한동안은 저고리의 변천을 실증할 만한 사료가 없다.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와 ≪삼국사기≫ 잡지(雜志) 색복(色服) 신라조(新羅條)에 저고리로 생각되는 ‘단의(短衣)’·‘내의(內衣)’ 등이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저고리에 대한 기록으로 ‘동의(胴衣)’라는 말이 보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저고리와 단저고리의 두 가지가 보이는데,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한 가지 설은 저고리와 단저고리의 구별은 길이의 길고 짧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옆이 터지거나 막힌 형제의 차이에 있는 것이다.

옆이 터지고 긴 저고리가 후대의 당의로 발전하고, 옆이 막히고 짧은 저고리인 단저고리가 현재의 여자저고리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저고리와 단저고리의 차이를 그 길이에 있다고 보는 것으로, 단저고리는 내복으로 입던 저고리라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길이가 짧아져 띠 대신 고름이 생김으로써 오늘날과 비슷한 저고리의 모양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저고리의 길이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점차 짧아진다. 지금까지 조사된 저고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530년대와 1560년대의 유물이다. 이것은 이미 띠가 필요 없을 만큼 짧아져 띠 대신 고름이 달려 있고, 각 부의 구성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로 여러 점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어 조선시대 저고리의 변천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1600년대의 저고리는 길이가 60∼80㎝이고, 1700년대에는 45㎝ 정도, 1800년대에는 35㎝ 정도, 1900년대에는 22㎝ 정도로 짧아졌다. 여자저고리는 줄곧 단소화(短小化)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경향은 조선시대 중기·후기에 더욱 가속화되어 그 길이가 가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짧아지고, 직배래를 이룬 소매는 벗을 때 소매를 뜯어내야 할 정도까지 이르러 요사(妖邪)하다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저고리가 짧아짐에 따라 각 부의 형태도 작아졌고, 특히 고름은 가늘고 짧아졌다. 반면, 회장은 겨드랑이에서 소매를 따라 나아가는 등 더욱 강조되었다. 이와 같이 저고리가 짧아진 현상은 엄청나게 큰 머리모양, 풍성한 치마와 어울리기 위한 것으로, 그 당시의 해이하고 화미(華美)하였던 사회풍조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소화의 경향은 말기에 약간의 반전기미를 보이다가 개화기에 들어 1920년대까지 지속된다. 그 뒤 1930·1940년대에는 저고리의 길이와 각 부가 커지는 장대화(長大化)의 경향이 나타난다.

의생활의 합리화에 대한 시도로서 길어진 저고리와 함께 개량된 짧은 치마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경향은 광복과 6·25를 지나면서 다시 바뀌어 오늘날에는 다시 짧아지고 있다.

현대의 저고리는 조선 후기에 해당할 만큼 그 길이가 짧으며, 겨드랑이의 회장이 크고, 소매의 곡배래가 극단적으로 강화되며, 깃이 아주 늘어진 특징을 가진다. 이것은 양장이 일상복으로 입혀짐에 따라 한복은 의례복화·특수복화하고, 여기에 현대적 미의식과 민족의식이 강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고리는 우리 고유양식의 특성을 면면히 이어 내려온 전승력과 변화·발전을 거듭하는 생명력을 지니고 우리 나라 복식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고려도경(高麗圖經)』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조선복식고』(이여성, 백양당, 1947)
『한국복식사』(석주선, 보진재, 1971)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3)
『한국복식사연구』(류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한국복식사론』(이경자, 일지사, 1983)
「고구려고분벽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김원룡, 『진단학보』 21,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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