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이사금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7~80년이다. 석씨 성을 가진 최초의 왕으로 『삼국유사』에 많은 설화와 일화가 전해진다. 그에 따르면, 탈해는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 출신으로, 경주 동쪽의 해안가에 살았으며 박씨족과의 연합으로 왕위에 올랐다. 8년(남해차차웅 5)에 박씨족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10년에는 대보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총괄했다. 유리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은 뒤 국호를 계림으로 바꾸었다. 백제와 가야의 침략을 물리친 업적이 있고 박씨의 인척들에게 주·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성은 석씨(昔氏)이며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또는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이라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이처럼 탈해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그에 따라 탈해의 출자(出自)와 이동경로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다. 대체로 북아시아의 기마민족 계통으로 보는 북방설, 해양세력으로 중국이나 일본 열도를 거쳐 왔다고 보는 남방설, 낙랑계(樂浪系) 유이민으로 보는 낙랑설(樂浪說)이 있고, 이밖에 목지국설(目支國說), 고조선설(古朝鮮說), 사로국(斯盧國) 본토설 등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왕(南解王: 南解次次雄)의 딸 아효(阿孝 · 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부왕(父王)인 다파나국의 왕이 비(妃)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金官加耶)를 거쳐 계림(鷄林)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 때 한 노파에 의해 건져지게 되어 양육되었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養母: 그 어미 또는 거두어 준 노파)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해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 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석씨 부족이 어로를 주요 생활수단으로 했지만 이미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탈해가 처음 신라 사회에 정착했을 당시 호공의 집을 빼앗은 일화는 이주민인 탈해집단과 선주민인 박씨족(朴氏族)과의 대립을 알려준다. 그러나 탈해가 박씨족 임금인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또 탈해가 왕으로 즉위한 후 갈등관계에 있었던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삼는 등의 일은 박씨족과 연합한 양상을 알려준다.
탈해는 8년(남해차차웅 5)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고, 10년에는 대보의 자리에 올랐다.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의 즉위 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와 이빨 수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왕의 사위이므로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한 철을 이용한 군사력 확보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함으로써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보기도 한다.
58년호공을 대보로 삼고, 64년 백제군이 와산(蛙山) · 구양(狗壤)의 두 성을 비롯해 이후 4∼5회 공격해왔다. 65년(『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60년)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金櫃)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가 있었는데, 이가 김알지(金閼智)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그것을 국호로 삼았다.
67년 박씨의 인척(姻戚)으로서 주 · 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 · 군주(郡主)라 이름하였다.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黃山津)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