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유리왕조에 등장하는 협보(陜父)의 사례가 유일하다. 협보는 주몽과 함께 부여에서 도망나온 왕실 측근세력으로, 유리왕에게 정사에 힘쓸 것을 간하다가 파직되었다.
신라에서는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당시 대신(大臣)인 탈해(脫解)에게 나라 일을 위임하면서 설치하였다.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재위 시기에 호공(瓠公) 또한 대보의 관직에 있었다.
대보가 설치되었을 당시 고구려와 신라는 관직 분화 및 정치 · 행정 · 군사권의 분리가 완성되기 이전이었다. 대보는 이 시기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두루 맡은 최고위 관직으로 이해된다.
대보라는 관직명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고구려와 신라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삼국시대 초기에 존재하던 고유의 관직을 후세에 한식(漢式)으로 표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