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가 되기 전인 13년(유리왕 32) 겨울 11월 부여가 쳐들어오자 적은 군사로 복병을 써서 이를 격퇴하였다. 재위 초반에도 부여와의 관계에서 여러 사건이 있었다. 21년(대무신왕 4) 부여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는 과정에서 괴유(怪由), 마로(麻盧) 등이 따르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고, 22년(대무신왕 5) 2월에는 부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였으나, 정벌에는 실패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부여 왕 대소의 동생이 압록곡에 와서 갈사국을 세웠고, 7월에도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이 투항해 와 연나부에 안치하였다.
부여와의 관계 외에도 주변 세력에 대한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26년(대무신왕 9) 10월에는 압록강 상류 방면의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았고, 12월에는 구다국(句茶國)의 항복을 받았다. 30년(대무신왕 13) 가을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 등이 투항하였고, 32년(대무신왕 15)에는 호동왕자(好童王子)의 활약으로 최리의 낙랑국(樂浪國)을 멸망시켰다.
이외에도 28년(대무신왕 11) 후한 요동군이 침입해 왔을 때에는 송옥구(松屋句)와 을두지(乙豆智) 등의 지략으로 이를 물리쳤고, 32년(대무신왕 15)에는 중국 후한(後漢)의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신을 보내 왕호(王號)를 다시 인정받았다.
한편, 건국 초기 고구려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도 힘썼다. 25년(대무신왕 8)과 27년(대무신왕 10)에는 각각 우보(右輔)와 좌보(左輔)를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좌우보제의 성립은 계루부(桂婁部) 왕권의 성장 과정에서 기존 대보(大輔) 관직이 분화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이를 나부(那部) 사이의 공동 정치 운영 방식으로 보기도 한다.
32년(대무신왕 15)에는 동명왕(東明王)의 옛 신하였던 구도(仇都) · 일구(逸苟) · 분구(焚求) 등 3인의 비류부장(沸流部長)을 서인(庶人)으로 삼으며 탐학한 대신들을 축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