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와왕(金蛙王)의 맏아들이다. 대소가 태자로 있을 때 이복동생인 주몽(朱蒙)의 위인됨을 꺼려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주몽은 달아나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금와왕이 죽고 왕이 되어 서기전 6년(유리왕 14)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인질교환을 제의하였다.
유리왕은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보내려 하였으나 태자가 두려워 가지 않으니 대소왕이 노하여 5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마침 큰 눈이 내려 얼어죽는 자가 속출하여 부여군은 후퇴하였다.
서기 9년 대소왕이 고구려에게 부여를 예로써 섬기기를 강요하자 유리왕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태자 무휼(無恤)의 지략으로 대소왕의 강요를 거절하였다. 20년(대무신왕 3) 대소왕은 머리는 하나이고 몸뚱이는 2개인 붉은 까마귀를 부여가 고구려를 병합할 징조라 하여 고구려에 보냈다.
그러나 대무신왕은 이 까마귀가 고구려가 부여를 아우를 징표라 하니 대소왕이 크게 놀라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22년 대무신왕이 부여의 남쪽을 공격하니 대소왕은 전국의 병력을 동원하여 맞섰다. 이때 고구려의 장군 괴유(怪由)가 대소왕을 죽였다.
대소왕이 죽자 그의 아우가 도망하여 갈사수(曷思水) 근처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고, 그의 종제(從弟)는 부여를 다시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부여의 백성 1만여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