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왕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고구려 제16대 왕.
이칭
본명
사유(斯由), 유(劉), 쇠(釗)
시호
국원왕(國原王), 국강상왕(國岡上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371년(고국원왕 41)
주요 관직
제16대 고구려 국왕
관련 사건
342년 전연(前燕) 모용황의 고구려 침공|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고구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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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고국원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6대(재위: 331~371) 왕이다. 국원왕, 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 314년(미천왕 15) 태자로 책봉된 후, 331년 2월 미천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영토 확장 과정에서 요동(遼東)과 부여(夫餘) 지역을 둘러싸고 전연(前燕)과 대립하였고, 남쪽으로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경쟁하였다. 371년 10월 평양성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정의
삼국시대 고구려 제16대 왕.
가계 및 인적 사항

고국원왕(故國原王)은 국원왕(國原王),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불린다. 이름은 사유(斯由)이며, 유(劉) · 쇠(釗)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미천왕(美川王)이고, 어머니는 주씨(周氏)이다. 자식으로는 뒤를 이어 차례로 즉위한 소수림왕(小獸林王)고국양왕(故國壤王)이 있다. 314년(미천왕 1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1년 2월 미천왕이 죽자 41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주요 활동

고국원왕이 즉위한 시기는 고구려가 선비(鮮卑) 모용부(慕容部)가 세운 전연(前燕)과 크게 대립하던 때이다. 이러한 대립은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대 중국 군현을 축출하고 요동 지역으로의 영토 확장을 꾀하였던 움직임의 연장선상이었다.

고국원왕은 대립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과 군사적 노력을 함께하였다. 먼저 336년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동진(東晉)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338년에는 전연 공격에 실패한 후조(後趙)와의 연결을 꾀하였다. 또한, 336년 모용황(慕容皝)의 즉위에 반대해 일어난 ‘모용인(慕容仁)의 난’에 가담하였던 곽충(郭充)과 동수(冬壽)가 도망쳐오자 이들을 받아들였고, 338년 후조와 전연의 싸움에서 후조에 동조하였던 봉추(封抽)와 송황(宋晃)이 투항하자 이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외교적 노력과 함께 군사적 준비에도 힘썼다. 335년에는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푸순시〔撫順市〕로 여겨지는는 제3현도군 지역을 차지하고 신성(新城)을 축조하는가 하면, 342년(고국원왕 12) 2월에는 국내성(國內城)환도성(丸都城)을 증축하여 결전에 대비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적의 대대적 침공이 임박하자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전연 모용황은 342년 11월 고구려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시 전연이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던 길은 평탄한 북도와 험난한 남도가 있었다. 고구려는 적의 주력이 기병인 점을 고려하여 북도로 침공해 올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전연은 북도로 1만 5천 명의 군사만 보내고 정예 주력 4만 명을 남도로 보내 침략해 왔다. 정예 주력 5만 명을 북도로 보낸 고구려는 북도를 통해 들어온 전연의 군대를 궤멸시킬 수 있었으나, 남도를 통해 들어온 전연군에 의해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선왕인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왕비 및 왕모 주씨, 그 외 5만여 명이 인질로 잡혀갔다. 당시 잡혀간 인질은 전연이 중원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고구려라는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 고국원왕 역시 단웅곡(斷熊谷)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처지에서는 수도를 함락당하였지만 북도를 수비한 고구려 주력이 건재하였기 때문에 반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전연 역시 이러한 측면을 염려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연과의 전쟁 이후 고국원왕은 343년 평양동황성(平壤東黃城)으로 왕의 거처를 옮겼고, 전연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하를 자칭하며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다. 이후 355년 12월이 되어서야 왕의 어머니가 고구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고국원왕은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 낙랑공(樂浪公)으로 책봉되었다.

고국원왕은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백제와도 경쟁하였다. 부왕인 미천왕대 대방군을 축출한 이후 이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삼으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는데, 요동 지역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이후 남쪽으로의 진출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고국원왕은 369년 2만 명의 병력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치양(雉壤)을 점령하였지만, 백제 태자가 지휘하는 백제군의 반격을 받아 5천 명이 목숨을 잃는 패배를 당하였다.

371년에 다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매복하고 있던 백제군의 기습 공격에 패배하였다. 같은 해 10월 백제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近仇首)와 함께 정예병 3만 명을 동원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고국원왕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한편,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472년 북위(北魏)에 국서를 보내면서 백제가 고국원왕을 잡아 목을 베었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는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상훈과 추모

고국원왕의 장지는 고국지원(故國之原)이다. 고국원왕릉에 대해서는 대채로 '우산하 0922호분'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며, 그 외 '천추총'이나 '우산하 0540호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진서(晉書)』

단행본

정호섭, 『고구려 고분의 조영과 제의』(서경문화사, 2011)
임기환 외, 『고구려 왕릉 연구』(동북아역사재단, 2009)
孫仁杰 · 遲勇, 『集安高句麗墓葬』(香港亞洲出版社, 2007)
임기환, 『고구려 정치사 연구』(한나래, 2004)
공석구, 『고구려 영역확장사 연구』(서경문화사, 1998)

논문

김지희, 「高句麗 故國原王의 平壤 移居와 南進」(『韓國史論』 62, 2016)
공석구, 「고구려의 요동지방 진출 정책과 모용씨」(『군사』 54, 2005)
여호규, 「4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고구려 고국원왕의 생애」(『역사문화연구』 20, 2004)
여호규, 「4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역사와 현실』 36, 2000)
今西春秋,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 · 木底」(『靑丘學叢』 2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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