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 ()

청어
청어
동물
생물
청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정의
청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개설

학명은 Clupea pallasii CUVIER et VALENCIENNES이다. 몸은 옆으로 납작[側扁]하고 아래턱이 돌출하고 있다. 몸빛은 등쪽은 담흑색에 다소 푸른 빛을 띠고 있고, 배쪽은 은백색이다. 비늘은 벗겨지기 쉬운 둥근 비늘이다.

생김새가 정어리와 아주 닮았으나 청어는 주새개골에 방사상 융기선이 없는 것, 옆구리에 반점이 없는 것 등이 다르다. 몸길이는 35㎝에 달하여 정어리보다 크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청어는 냉수성 어류인데 옛날에는 우리 나라 전연안에서 어획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조(土産條)를 보면 전도의 연안에서 어획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청어는 일찍부터 산업적 가치가 높은 물고기로서 도처에서 어획되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일현(迎日縣) 산천조의 주진(注津)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세간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년 겨울에 청어가 반드시 먼저 여기에서 산출되는데 진헌(進獻)한 뒤에 제읍(諸邑)에서 이를 잡기 시작하며 그 산출의 다소에 의하여 다음해의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고 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휘하의 수군이 청어를 많이 잡았다. 일례로서 ≪난중일기≫에 의하면 1595년(선조 28) 12월 4일의 일기에 “순천 2선(船) 낙안 1선을 군사 점검하고……황득중(黃得中)·오수(吳水) 등이 청어 7천여 급(級)을 싣고 오므로 김희방(金希邦)의 곡식 사러 가는 배에 세어 주었다.”는 구절이 있다. 청어를 잡아 군량미와 바꾸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광해군 때에 허균(許筠)이 지은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에 의하면 “청어는 4종이 있다. 북도산(北道産)은 크고 속이 희다. 경상도산은 껍질은 검고 속은 붉다. 전라도산은 조금 작으며 해주에서 잡은 것은 2월에 맛이 극히 좋다.”고 하여 산지에 따라 청어가 상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徐有榘의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 玆山魚譜≫ 등에는 청어의 회유로(洄游路)를 설명하고 있다.

당시 청어의 회유에 관한 것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주목할만한 일이나 그 신빙성은 크지 않다. 서해산 청어와 동해산 청어는 각각 종족을 달리하는 독립적인 계통군에 속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과거 황해방면의 청어는 독립적인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였으며, 동해의 청어와 황해의 청어가 교류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수온이 특히 낮은 해의 겨울에 전라남도 연안을 통하여 동해의 청어가 황해에 침입하는 데 그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남해안산 청어의 서한(西限)은 경상남도 사천만 근처까지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흑산도 사람 장창대(張昌大)의 말을 인용하여 영남산은 척추골이 74개이고 호남산은 53개라고 하였다.

척추골 수가 이와 같이 차이가 컸다면 서해산 청어는 동해산 청어와 같은 계통군인 영남산 청어와는 상이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창대의 말은 믿기 어려운 데가 있고 척골 수의 계산에 있어서도 어떻게 계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제시대에 한 전문가가 동해산 청어의 척추골 수를 조사한 일이 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평균 53.85개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76년 11월 25일에 흑산도 근해에서 잡힌 청어의 척추골 수를 조사한 것을 보면 그것은 52개였다. 후자는 장창대가 말한 것과 거의 같은 수인 것이 흥미롭다.

청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 여러 곳에서 심한 자원변동을 보였는데 우리 나라 연해에 있어서의 청어도 그 자원이 다른 어류자원과는 달리 아주 심한 단기적 또는 장기적인 변동현상을 보였다.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는 청어자원변동에 관한 것이 종종 언급되어 있다. ≪중종실록≫ 6년 4월 정해조에는 서해안의 위도에는 예전부터 청어가 다산하던 곳이나 1506년(중종 1) 이후부터는 청어가 잡히지 않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는 봄철에 서남해에서 항상 다산하던 청어가 1570년(선조 3) 이후부터 전혀 산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발생하였던 기이한 일들을 전하는 가운데,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에서 나고 점차 한강까지 이르렀으며, 원래 해주에서 나던 청어가 근 10여년 동안이나 전혀 나지 않고 요해(遼海)에 이동하여 나니 요동사람이 이를 신어(新魚)라고 일컬었다.”고 하고 있다.

그 이후에도 우리 나라 연안 각처에서 잡히기는 하였으나 자원의 성쇠소장은 심하였다. 많이 잡힐 때에는 최다어획류의 하나로 손꼽혔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100여년 전에 심히 성하였다가 중간에 절산(絶産)되었는데, 1798∼1799(정조 22∼23)년에 다시 나타나 조금 흔하여졌다.”고 하였다.

같은 책에는 또 “대체로 해주에서 나는 것이 국중(國中)에 넘친다. 기미년(1799) 이후부터 20미를 엮어서 1급으로 하여 동전 2, 3문과 바꾸었다. 순조 때의 경인·신묘년(1830∼1831)간에는 1급의 가격이 40∼50문이었고 점차 등귀하였다. 헌종 때 을미년(1835) 이후에는 다시 점차 흔하여졌으나 기미년 이후만은 못하였다.”고 하여 청어자원의 변동과 이에 따른 가격 등락을 비교적 잘 설명하고 있다.

19세기 후반기에 접어들어 서해안의 청어자원은 곳곳에서 줄어들기 시작하여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해안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게 되었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 청어어장은 경상도의 동북연안으로 국한되었다. 일제시대에도 청어자원은 변동이 심하여 어장의 동점북천(東漸北遷)현상을 보였다. 그리하여 1910년대 초에는 부산·울산 등지에서도 청어가 잡히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산업적으로 청어어업이 성립될 수 있는 어장은 영일만 이북의 동해안으로 좁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어획량은 어구·어법의 발달, 어업자수의 증가 등에 힘입어 증가추세를 보여 1911년에 약 3,000M/T에 불과하던 것이 1935년에는 약 5만M/T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는 감소추세를 보이다가 광복 직전에는 격감하여 사실상 청어어업은 중단되다시피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서해안에서 기선저인망과 기선건착망에 상당히 많이 잡히기 시작하여 1971년에는 근 7,000M/T이 잡혀 청어자원 회복의 꿈을 안겨주었으나 그 이후 다시 감소되어 근래에는 겨우 수백M/T이 어획되고 있을 뿐이다. 1970년대에 잡힌 청어는 황해의 저층 냉수에 군집하여 있는 것이었고 연안에 내유한 것이 아니었다.

청어어구는 조선시대에는 세망(細網)이라는 명주실로 만든 자망이 많이 사용되었고 서해안에서는 어전(漁箭)이나 중선망(中船網)·주목망(柱木網) 등으로 잡았다. 남해안에서는 정치망으로도 잡았고 동해안에서는 지인망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는 자망과 정치망이 많이 사용되었다.

청어는 일찍부터 관목(貫目)이라는 건제품으로 가공되어 많이 소비되었다. 또 주목되는 것으로서 조선시대에 이미 연관목(烟貫目)이라고 하는 청어훈제품이 제조되고 있었다. 청어자원이 감소된 원인은 남획에 의해서라기보다 수온변화 등의 자연적 조건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본다.

과거 서해안 연안에 많이 내유하였던 것은 황해 냉수괴의 세력이 연안까지 미쳤음을 의미한다. 이는 해양물리학적 측면에서도 연구가치가 있다고 본다. 변동이 심한 청어자원이 다시 또 풍부해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참고문헌

『오주연문장전산고』
『자산어보』
『한국어도보』(정문기, 일지사, 1977)
「한국청어어업사」(박구병, 『부산수산대학논문집』 17, 1976)
『朝鮮沿岸のニシンの生態及蕃殖に就いて』(朝鮮總督府水産試驗場, 1936)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박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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