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 ()

대한제국 황태자전하 가례식 기념장
대한제국 황태자전하 가례식 기념장
유교
의례·행사
오례(길례 · 가례 · 빈례 · 군례 · 흉례)의 하나로 경사스러운 예식 또는 왕실 가족의 혼례를 지칭하는 용어.
이칭
이칭
왕실 혼례
정의
오례(길례 · 가례 · 빈례 · 군례 · 흉례)의 하나로 경사스러운 예식 또는 왕실 가족의 혼례를 지칭하는 용어.
개설

가례(嘉禮)는 오례 가운데 하나로, 백성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의례를 말한다. 여기에는 왕비·왕세자·왕세자빈의 책봉(冊封), 왕세자와 왕세손의 관례(冠禮), 국왕과 왕세자의 혼례, 왕실 가족에게 존호를 올리거나 축하 잔치를 여는 등의 행사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협의의 가례는 왕실 가족의 혼례를 가리키며, 이를 위해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설치되었고 혼례가 끝난 다음에는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가 작성되었다.

연원 및 변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보면, 왕실 가례는 국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납비의(納妃儀)」, 왕세자가 왕세자빈을 맞이하는 「왕세자납빈의(王世子納嬪儀)」, 왕자가 신부를 맞이하는 「왕자혼례(王子婚禮)」, 왕녀가 신랑을 맞이하는 「왕녀하가의(王女下嫁儀)」 등 네 가지가 있다. 왕실 가례의 본 의식은 육례(六禮)라 불리는 여섯 가지 절차로 구성되며, 왕자와 왕녀의 혼례에서는 그 중에서 고기(告期)와 책봉 절차가 없었다.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가례 절차는 조선시대 전 시기를 통해 큰 변화가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국왕이 왕비를 맞이할 때 처음에는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왕비를 맞이하는 봉영례(奉迎禮)를 거행하였지만 후대에는 국왕이 직접 맞이하는 친영례(親迎禮)로 바뀌었다. 왕실에 친영례가 도입되는 과정은 태종 대에 세자와 왕자의 친영이 이루어졌고, 세종 대에 왕자와 왕녀의 친영이 이루어졌으며, 종종 대에 처음으로 국왕 친영이 이루어졌다. 또한 왕비나 왕세자빈이 종묘에 가서 선대 국왕과 왕비에게 인사를 올리는 묘현례(廟見禮)는 중종 대에 논의를 시작하였지만 숙종 대에 와서야 거행되었다.

행사내용

조선 왕실의 가례 절차는 예비 의식, 본 의식, 식후 의식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예비 의식에는 금혼령(禁婚令), 삼간택(三揀擇), 별궁(別宮)에서의 수업이 있었다. 금혼령은 왕실 가례가 있을 때 민간의 혼사를 금지하는 명령으로, 혼인을 허락하는 범위와 처녀 단자(處女單子)를 들이는 기한을 명시하였다. 처녀 단자에는 처녀의 출신 지역과 성명, 생년월일시, 사조(四祖)의 이름, 나이, 부친 이름이 기록되고, 왕실의 가까운 친척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삼간택은 세 차례에 걸쳐 왕비나 왕세자빈을 선발하는 절차였다. 왕실의 어른인 왕대비나 국왕이 처녀 단자를 바탕으로 후보자를 가렸으며, 초간택에서 6명, 재간택에서 3명, 삼간택에서 최종 1명의 후보를 선발하였다. 별궁에서의 수업은 삼간택에 선발된 왕비나 왕세자빈이 가례 날까지 별궁에 머물면서 국모(國母)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을 익히는 것이다. 별궁은 태평관, 어의궁, 운현궁, 안국동 별궁 등이 이용되었다.

본 의식에는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冊妃) 혹은 책빈(冊嬪), 친영(親迎), 동뢰(同牢) 등 여섯 가지 절차가 있었다. 납채는 신랑 집에서 혼례를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신부 집[별궁]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국왕의 명령을 받은 사신은 별궁으로 가서 교서와 기러기를 전달하였다. 납징은 납폐(納幣)라고도 하며, 신랑 집에서 별궁으로 폐백을 보내는 것이다. 이날 신부는 폐백을 받았고, 신부의 부친과 선조들은 관작(官爵)을 받았다. 고기는 신랑 집에서 혼례 날짜를 알려주는 절차로 기일을 알리는 국왕의 교서가 전달되었다. 책비 혹은 책빈은 신부를 왕비나 왕세자빈으로 책봉하는 것이다. 국왕의 명령을 받은 사신은 국왕이 내리는 교명(敎命), 책(冊), 보(寶), 명복(命服), 신부가 궁으로 들어올 때 사용할 가마와 의장(儀仗)을 가지고 가서 전달하였다. 이 절차를 통해 신부의 지위는 왕비나 왕세자빈이 되었다. 친영은 신랑이 별궁으로 가서 기러기를 전달한 후 신부를 맞이하여 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신랑이 기러기를 전달하면 신부의 부모는 신부에게 경계의 말을 하였고, 신랑은 신부와 함께 궁으로 돌아왔다. 왕세자의 혼례에서는 친영에 앞서 국왕이 왕세자에게 경계의 말을 하는 임헌초계(臨軒醮戒)가 있었다. 동뢰는 궁에서 신랑과 신부가 함께 절을 하고 석 잔의 술을 마시는 절차를 말한다. 이때 신랑은 동쪽, 신부는 서쪽에 자리하며, 동뢰 절차가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방으로 들어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식후 의식에는 조현(朝見)과 묘현(廟見)이 있었다. 조현은 육례를 마친 신부가 왕실의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의례로, 시집온 며느리가 웃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면서 대(代)를 이음을 상징하는 절차이다. 묘현은 신부가 종묘를 방문하여 선대 국왕과 왕비에게 인사를 하는 의례로 혼례를 거행한 후 3개월 이내에 이루어졌다. 새 왕비를 맞이하였을 때에는 국왕과 왕비가 종묘를 방문하였고, 왕세자빈을 맞이하였을 때에는 국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함께 종묘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실의 혼례가 마무리되면 관리들은 가례를 축하하는 전문(箋文)을 올렸고, 국왕은 가례에 참여한 관리들에게 공적에 따라 상을 내렸다.

특징

국왕이나 왕세자의 가례는 왕실은 물론이고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축하해야 할 경사였지만 악기를 배치하기만 하고 음악을 연주하지는 않았다. 이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공자의 말 때문인데, 공자는 “부인을 맞이하는 집에서는 3일 동안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어버이를 계승함을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혼례 자체는 기쁜 일이지만 어버이를 대신하여 가계를 계승하는 것이므로 기뻐할 수만은 없다는 의미였다. 조선 왕실은 세조 대의 혼례에서 음악을 연주하였지만 성종 대 이후로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조선 왕실의 책례와 가례」(김문식, 『조선의 국가 의례, 오례』, 국립고궁박물관, 2015)
「조선 왕실의 친영례 연구」(김문식, 『조선 왕실의 가례』 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집필자
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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