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치막(中致莫)에 관한 문헌과 유물은 16세기 중반부터 확인된다. 중치막이라는 명칭은 문헌에서 ‘中赤莫’, ‘中致莫’, ‘重赤莫’, ‘中超莫’, 듕치막 등으로 기록되었다. 중치막이 언급된, 왕과 관련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역대 『빈전도감의궤』, 『빈전혼전도감의궤』 「삼방의궤」에 있으며, 왕세자의 중치막에 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 『빈궁혼궁도감의궤』 「삼방의궤」에 있다. 사대부들이 중치막을 착용한 기록은 『묵재일기』, 『쇄미록』, 『순천김씨 언간』, 『현풍곽씨 언간』, 『홍재전서』, 『상례언해』』, 『사례편람』, 『광례람』, 『숙재집』 등에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착용하던 중치막은 1884년(고종21)에 광수의 도포, 직령, 창의, 중의 등을 금지하는 사복(私服) 제도를 개정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중치막의 형태는 곧은 깃에 소매가 넓고 무가 달려 있으며 양옆에 트임이 있다. 겨드랑이에는 삼각무가 달려 있었으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무와 삼각무가 사라지게 되었다. 왕의 중치막 착용 용도는 습, 소렴, 대렴, 자궁 의대였으며, 또한 이것은 해인사의 장경판전을 재중수할 때의 공물로 사용하였다. 직물은 단(緞), 능(綾), 주(紬) 등이며, 무늬는 용문, 운보문(雲寶紋), 포도문 등을 사용하고, 색상은 옥색, 남색, 초록색이었다. 세자의 중치막 착용 용도는 문효세자의 습과 소렴에 관한 기록으로 알 수 있으며 직물은 단과 주를, 색상은 자적(紫赤), 연두, 옥색, 남색 등을 사용하였다. 사대부들은 관복과 다른 포(袍)의 받침옷이나 평상복, 염습의로 사용하였으며, 직물은 면주를, 색상은 청색 계열과 소색(素色) 계열을 입었는데 실제 착용한 모습은 회화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치막의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6세기 유물로 2009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 제259호로 지정된 ‘문경 최진 일가 묘 출토복식’에 있는 아청색 누비 중치막이다. 이 옷에 대한 왕의 유물로는 해인사 성보 박물관에 소장되어 국가민속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던, 광해군(光海君,1575~1641)의 담청색 운보문단(雲寶紋段)으로 만든 솜 중치막이 있다. 사대부들의 중치막 유물은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출토 유물과 전래 유물 등이 많이 있다. 유물은 16세기에 처음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17세기는 유물이 가장 많이 있어 이 시기에 중치막이 가장 널리 착용한 것을 알 수 있으며, 18세기에서 19세기로 갈수록 유물의 수량은 적어진다. 유물의 유형은 홑, 겹, 솜, 누비 등 다양하였다.
시대에 따라 형태는 깃, 소매의 모양, 겉섶, 무, 겨드랑이의 삼각무가 변화하였다. 깃의 형태는 이중 칼깃, 칼깃, 목판(木版) 당코 깃에서 점차 둥근 깃으로 변화하였으며, 소매의 모양은 착수 형에서 두리 소매 형으로 변화한 후 광수 형으로 되었다. 겉섶의 너비는 초반에는 넓어 이중 섶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너비가 좁아져서 단일 섶으로 변하였다. 양옆에 있는 무는 사다리꼴에서 삼각형으로 변화한 후 17세기부터 점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겨드랑이의 삼각무은 무의 형태 변화에 따라 같이 사라지게 된다. 중치막을 착용할 때는 머리에는 흑립을 쓰고 허리에는 세조대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