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최희평(崔希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숙공(文肅公) 최유(崔瑈)이며, 아버지는 상산부원군(尙山府院君)최선능(崔善能)이다.
1380년(우왕 6) 비장(裨將)으로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성(崔茂星) 등과 더불어 신주(信州)·안악(安岳)·봉주(鳳州)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시키고, 이듬해 해도만호(海道萬戶)가 되었다. 그러나 사사로이 군사 30명을 놓아주고 그 식량을 자기 집에 운반하였다가 발각되어 하옥되기도 하였다.
1388년 왜구가 삼도에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약탈을 자행하자 밀직부사로서 자혜부사(慈惠府使) 조언(曺彦)과 함께 이를 격퇴시켰으며, 다음해 경상도 원수(元帥) 박위(朴葳)가 대마도를 정벌할 때 그를 뒤따라가 대마도인 300여명을 잡아가지고 돌아왔다.
뒤에 대마도를 정벌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칠석(七夕)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한때 유배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종손인 최양(崔瀼)과 함께 고향에 은거하였다가 태조의 부름을 받아 1394년(태조 3) 경기도도수군절제사(京畿道都水軍節制使)에 보임되었으나 곧이어 병으로 죽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남달리 키가 컸으며, 임금의 명을 받아 기선(騎船)을 만들었고, 특히 왜구를 방어하는 데 공이 많았다. 시호는 위정(威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