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정종 2) 방간(芳幹)의 난 때 대장군으로 활약하였고 태종의 즉위 이후 남포진병마사(藍浦鎭兵馬使)가 되었다. 1406년(태종 6)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경기좌도수군절제사로 전함을 수리하여 왜선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는 금령(禁令)을 범하고 정승 조영무(趙英茂)의 집에서 분경(奔競)을 하였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였다가 다시 중군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에 복직되었다.
1408년에는 안주도병마사·판안주목사를 거쳐, 1409년 강계도도병마사가 되었다. 1411년 각 위(衛)에 절제사를 두면서 강계절제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개천도감제조(開川都監提調)를 거쳐 응양위(鷹揚衛)의 우일번절제사(右一番節制使)가 되었다.
1417년에는 함길도병마도절제사로 용성에 성을 쌓았으나, 이듬해 군기(軍器)를 정련(精鍊)하지 않았다는 죄로 탄핵되기도 하였다. 1419년 이종무(李從茂)가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대마도(對馬島) 정벌 계획 당시 충청해도조전절제사(忠淸海道助戰節制使)가 되어 충청지역의 병선과 수군을 관장하였다.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424년(세종 6)에는 과거 경주부윤 재직 당시의 장물이 86관이 된다는 이유로 탄핵당하다가 이듬해 결국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그뒤 1435년 직첩(職牒: 관직 임명사령장)은 돌려받았으나 관직 생활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