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경(士京), 호는 즉지헌(則止軒). 유철(兪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명건(兪命健)이다. 아버지는 우윤 유직기(兪直基)이며, 어머니는 김유경(金有慶)의 딸이다.
1761년(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儼堤防裕昆錄)』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김문순(金文淳)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 정치의 제거가 청의(淸議)와 명분을 살리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 동지들의 모임인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의 타파를 탕평으로 생각한 영조의 엄명으로 흑산도로 정배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1802년(순조 2)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김우진(金宇鎭)·심환지(沈煥之)·김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홍봉한의 당을 공격함이 의리라는 김구주 당의 견해에 동조했다. 이에 순조대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즉지헌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