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참의, 평안감사,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다음 해에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 정치의 제거가 청의(淸議)와 명분을 살리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 동지들의 모임인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의 타파를 탕평으로 생각한 영조의 엄명으로 흑산도로 정배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洪國榮)·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이름이 『명의록』에 올라 있다.
그 뒤 이조참의·개성유수·규장각직제학·평안감사를 거쳐, 1787년(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1802년(순조 2)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또,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김우진(金宇鎭)·심환지(沈煥之)·김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홍봉한의 당을 공격함이 의리라는 김구주 당의 견해에 동조했다. 이에 순조대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즉지헌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명의록(明義錄)』
- 『은파산고(恩坡散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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