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시배(時輩)’라는 말은 통상 옳고 그름을 엄격하게 따지기보다는 시류에 적당히 편승하는 무리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시배와 같은 정파’라는 뜻의 시파는 벽파(僻派)가 정조의 탕평책에 적극 호응한 세력을 배척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시파는 벽파에 비하여 국왕의 뜻과 의리를 존중 · 순응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폄하의 뜻만 제거한다면 정파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용어이다.
시파의 연원은 영조 대 중반 노론 홍봉한의 북당(北黨)과 이천보의 동당(東黨)까지 올라간다. 북당은 한양의 북촌에 살면서 영조와 인척 관계를 맺거나 대대로 사환하던 노론 탕평당 벌열 가문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고 있었다. 동당에는 한양의 동촌(東村)에 세거한 문한(文翰) 집안이 많았는데 노론 청론(淸論)을 표방하면서 탕평책에도 동조하던 세력이다.
북당과 동당에는 신임옥사를 겪은 후 영조 대 탕평에 호응하면서도 노론의 신임의리를 실현하는 데 기여했던 노론 4대신의 후예와 김창집- 김원행 계열 낙론(洛論)이 많았다. 특히 홍봉한(洪鳳漢)은 세자의 장인, 미래의 국구(國舅)로서 북당을 이끌면서 세자 보호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동당과 연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노론 4대신의 문집 간행을 돕는 등 남당 주도의 반(反) 세자론에 맞섰다.
1762년(영조 38)의 임오화변은 영조가 세자의 ‘광병(狂病)’으로 세자를 폐위한 비극이다. 하지만 영조가 이를 대의를 위한 결단으로 처리하였기에 보호론자든 반(反) 세자론자든 신하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영조는 ‘영조의 임오의리’에 의거하여 갑신처분(1764년, 영조 40)을 내리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변경하여 종통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영조 대 후반에는 세손 보호와 승계가 정국의 최대 현안이 되었다. 임오화변 이후에 홍봉한은 세손 보호를 명분으로 정국을 주도하다가 사도세자 추숭 문제를 논의하였다는 잘못이 드러나 물러났다.
관료 세력인 동당은 임오화변 뒤에 전개된 남당 · 북당의 대립 구도 속에서 조정에서는 입지가 약화되었다. 반면, 노론 남당은 김종수(金鍾秀)가 이끌던 청류에 새 척신 김귀주(金龜柱)가 가세하여 공홍(攻洪)을 넘어 살홍(殺洪)을 주장하는 등 그 세력을 강화하였다. 홍봉한에 이어 홍인한이 이끌던 북당은 세손의 대리청정을 저지하는 등 세손 즉위를 방해하는 죄를 저질러 정조 즉위 후 대거 처벌되었다. 동당 역시 정국에서 소외되어 있었으므로 세손의 즉위에 큰 기여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정조 대 초반에는 홍국영과 연계된 김종수 · 유언호 등 남당계 청류가 『 명의록(明義錄)』 의리의 주인 혹은 의리 제공자로서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홍국영이 축출된 1780년(정조 4) 이후 새로운 의리 주인으로 소론 완론인 서명선(徐命善)이 전면에 나서자, 이전에 위축되어 있던 노론 북당과 동당계 인사들이 그에게 협력하여 정국을 주도하면서 남당계 청류를 청요직에서 배제하였다.
서명선은 세손 대리청정 저지에 공을 세웠을 뿐이며, 노론 북당에게 협력했던 소론 완론의 탕평파 출신이었다. 그래서 홍국영과 더불어 『명의록』 의리 확립을 주도하였다고 자부하는 남당에게는 여러모로 불만족스러운 인사였다. 이 때문에 노론 남당은 1784년(정조 8) 전후로 서명선에 협력하는 노론 북당 · 동당 인사들을 ‘시배’라고 배척하고 스스로를 궁벽한 처지에서 의리를 보존하는 벽파로 대비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집권 전반기에 노 · 소론의 시파 위주로 탕평 정국을 운영하면서 규장각과 장용영을 신설하여 국정 장악력을 높였다. 그 뒤 1788년(정조 12)부터는 시파에게 밀려나 있던 벽파와 남인 소론 준론도 적극 참여시켜 탕평의 규모를 확장하였다. 이는 1789년의 현륭원 천장을 계기로 시작되어 1795년(정조 19) 화성 행차로 마무리된 사도세자의 재평가를 위한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노론 시파와 소론 준론과 남인 대(對) 노론 벽파 사이에 ‘영조의 임오의리’를 ‘정조의 임오의리’로 수정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상호 토역론이 난무하는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정조가 황극의 중심을 잘 잡았기에 당화(黨禍)는 없었고 화평(和平)의 의리도 가능해졌다.
시파는 벽파와 달리 영조 대 이래 신임의리에 의거한 탕평에 적극 참여하고 세자 보호에 힘쓴 세력도 있었으므로, 정조의 임오의리 변경을 직접 담당하려 했던 서유린(徐有隣) 형제 같은 추시파(追時派)도 나왔다. 그러나 시파의 상당수는 정조의 의리변경 의지에 마지못해 순응하는 부류가 많았다.
순조 초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벽파가 집권하자 시파는 정조의 의리변경에 동조한 세력으로 몰려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먼저 준소와 연합하여 벽파 토역론을 주도한 추시파가 제거되었고, 시파의 영수로 부상한 김조순의 예정된 국혼(國婚)마저 무산될 뻔하였다. 그러나 벽파가 무리한 정적 제거로 인해 왕실과 신료들 전반의 반발을 사고 말았다.
그러자 시파는 순조의 친정과 함께 혜경궁 · 박종경 · 김조순 등 왕실과 외척이 연합하여 정순왕후 철렴(撤簾)을 관철시킨 후 1806년(순조 6)에는 벽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파의 집권이 ‘정조의 임오의리’ 실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조순의 처지에서도 ‘정조의 임오의리’는 영조가 확립한 임오의리의 변경과 그에 따른 외척 구도 변경을 의미하는 부담스러운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정조 대 시파는 정조의 의리 변경에 부응하는 듯이 보였지만, 순조 대 시파는 국왕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노 · 소론 다수 신료들에게 무난히 수용될 수 있는 ‘영조의 임오의리’로 회귀하여 경화 벌열 세도가 위주의 정국 구도를 유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영조 대 중 · 후반 노론 북당과 동당을 연원으로 하는 시파는 신임옥사에서 희생된 명벌가의 후예이자 세자 보호에 힘쓴 인사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세손 즉위에 특별한 기여가 없었고 방해가 되기도 하였기에 『 명의록』을 기준으로 벽파에게 배척당했다.
하지만 정조대 의리탕평에 적극 참여하였고, 특히 추시파는 벽파 토역론을 전개하며 사도세자사건의 재평가와 정조의 의리 변경에 기여하였다. 이로 인해 순조 초에 시파는 벽파의 보복을 받았으나, 영조 대 이래의 사회 · 정치적 역량을 바탕으로 벽파를 물리치고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후 시파는 왕권까지 위축시켜서 세도정치를 개시한 정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