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대제학,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772년 청명(淸名: 청렴함과 명예)을 존중하고 공론을 회복해 사림 정치의 이상을 이루려는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의 정치적 결사가 드러날 때, 당파를 없애려는 영조에 의해 조정(趙晸)·김치인(金致仁)·정존겸(鄭存謙)·이명식(李命植) 등과 함께 지도자로 지목되어 경상도기장현의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방면되었다.
영조가 죽자 행장찬집당상(行狀纂輯堂上)이 되었고, 그 뒤 승지·경기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규장각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제학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대제학에 올랐고, 그 뒤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1789년 우의정에 올랐다.
1792년에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올라와 사도세자를 위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자, 예전에 정조와 대담했던 내용인 “순(舜)·주공(周公)과 같은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서 부모를 섬김이 효도.”라는 소를 올려 이 논의를 가라앉혔다.
다음 해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1794년사도세자를 위한 토역을 다시 주장한 남인 채제공(蔡濟恭)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의리를 굽히지 않아 정조의 두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어 평해에 유배, 남해에 이배되었다가 그 해에 치사(致仕: 벼슬길에서 은퇴함)해 봉조하가 되었다.
순조 때에는 척신인 김구주(金龜柱) 및 심환지(沈煥之)들과 당파를 이루어 정조를 기만하고 뒤에서 그 치적을 파괴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하여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곧 회복되었다. 1802년(순조 2)에 유언호(兪彦鎬)와 함께 정조묘에 배향되었다.
임성주(任聖周)·윤시동(尹蓍東)·김상묵(金尙默) 등과 친하게 교유했으며, 어려서부터 경술(經術)로써 일세를 풍미했다 한다. 정조는 윤시동·채제공과 더불어 3인을 자신의 의리를 조제하는 탕평의 기둥으로 지적하였다.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을 지어 올렸으며, 저서로는 『몽오집(夢梧集)』이 있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몽오집(夢梧集)』
- 『본암집(本庵集)』
- 『은파산고(恩坡散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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