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은 조선후기 동부승지, 숙위대장, 도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748년(영조 24)에 태어나 1781년(정조 5)에 사망했다. 영조 말년 벽파의 횡포 속에서 세손(뒤의 정조)을 보호한 공로로 정조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정조 즉위 후 왕궁 호위를 전담하고 도승지로서 국정 정보를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했다.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들여 원빈으로 삼고, 원빈이 죽자 정조의 동생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정조의 후계자로 삼으려 하는 등 세도정치에 급급했다. 1780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축출당한 뒤 병사했다.
1771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설서가 되었다. 이 때 영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그 소생인 손자(뒤의 정조)를 후계로 정하였다.
영조 말년 벽파의 횡포 속에서 세손을 보호한 공로로 세손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어 사서에 승진했고,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 홍인한 · 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또한 1776년 홍상간(洪相簡) · 홍인한 · 윤양로(尹養老) 등이 세손을 모해하려는 모역을 적발해 처형시켰다. 그 해 정조가 즉위하자 곧 동부승지로 특진하였다. 그 뒤 날랜 군사를 뽑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해 숙위대장을 겸직하는 등 왕궁호위를 전담하고 도승지에 올랐다.
실권을 잡은 그는 삼사(三司)의 소계(疏啓), 팔로(八路)의 장첩(狀牒), 묘염(廟剡), 전랑(銓郎)의 임명 등을 모두 알거나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삼공육경(三公六卿)까지도 그에게 맹종하게 되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조정 백관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말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모든 관리들이 그의 명령을 얻어야 행동할 수 있어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바쳐 원빈(元嬪)으로 삼아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원빈이 20세도 못 된 나이로 1년 만에 병들어 죽자,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인(恩彦君裀)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를 상계군(常溪君)으로 봉하고 왕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는 등 세도정권 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중에 왕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1780년 음식에 독약을 섞어 왕비를 독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에 축출당하였다.
그 뒤 고향에 내려와 칩거하던 중 병을 얻어 죽었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로 이조참의 · 대제학 · 이조참판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일설에는 자진해서 물러가라는 정조의 권고로 일시 은퇴하였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형벌을 받았다고도 한다.